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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포리스트 Dec 02. 2017

교육을 통한 신분 상승은 허상이다

노동가치의 이해가 먼저다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

 노동가치를 구별짓는 이데올로기는 교육을 통해 정당화가 된다. 한국사회에서 노동가치를 구별짓는 것은 교육제도를 통해 사회구성원들에게 학습된다. 사실 교육은 훌륭한 노동자가 되기 위해서 받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되기 위해서 교육을 받는 이유가 더 크다. 그럼에도 우리사회는 노동이란 말 자체를 천하게 여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게 작년에 <경향신문>의 조사 결과다. <경향신문>이 서울의 초등학생 11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노동’이라는 말을 듣고 ‘힘듦’을 떠올린 학생이 53명(48.1%)에 달했다. ‘노예/천민’을 떠올린 학생도 7명(6.3%)이나 됐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가 조사한 결과도 비슷했다고 한다. 나도 비정규직은 개인이 피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잠시나마 생각했었다. 내가 좋은 목표와 꿈을 가지면, 그리고 노력하면 비정규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학교에서도 그렇게 가르친다. ‘비전캠프’라고 이름 붙여진 곳에서 남의 노동을 멸시하는 방법부터 배운다. 노동의 가치를 모르게 교육받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일하는 동안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왜냐하면 ‘육체노동-비정규직’은 내가 지금까지 학교에서 배워온 바로는 ‘불쌍한 계층’이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그것도 ‘비정규직 육체노동자’라는 딱지가 붙는 순간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는 게 몸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나의 생각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바로는 비정규직, 그리고 육체노동은 도망치고, 극복해야 하는 문제였다. 비정규직이라는 사회적 늪에 빠진 것은 오롯이 개인에게 책임이 있고, 노력하지 않는 것에 대한 혹독한 대가로 배웠다.  우리의 교육은 노동의 가치를 짓밟아 오는 것이었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저런 일을 한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한다. “대학에 가지 못하면”이라는 말 속에는 좋은 노동을 하지 못한다는 사회적 의미가 숨겨져 있다. 우리에게 ‘비전’과 꿈은 오롯이 좋은 직장을 갖는 것이다. 청소년기에는 ‘비전캠프’라는 이름으로 자기계발 강사들 그리고 입시에 성공한 사람들이 강의를 했다. 평범하기보다는, 남들이 우러러 보는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문화였고, 교육이었다. 노동의 가치를 천하게 여기는 기본적인 관념이 들어가 있다. 

 결국에 귀한노동과 천한 노동으로 구분 짓는 이데올로기는 교육을 통해서 정당화가 된다. 일부는 ‘귀한노동’을 하고, ‘천한노동’을 일부가 한다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돌이켜보면, 학교 교육의 목적은 ‘천한노동’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가 공부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비정규직 및 육체노동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의 가치는, 사회적으로 사라진다. 그들 노동은 ‘하층민’이 하는 것이고, 사회의 실패자들이라는 인식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 이데올로기는 어린시절부터 학습된다. 자연스럽게 ‘공부해서 인생역전’하자는 이데올로기로 학교에 등교하고,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학생이 되어 간다.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노동의 가치를 구분지어왔다. 대학 졸업 후에 비정규직 육체노동자로 있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이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또한 천한 일이 아니다. 교육해서 극복해야만 하는 그런 일도 아니다. 다만, 내가 하는 일은 나름대로 귀한 일임에도 인정해주지 않는 사회가 문제였었다. 그러면 개인이 노력하면 비정규직은 피해갈 수 있는 것이었을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에 비정규직-육체노동자라는 것을 피해갈 수 있었다면, 나는 조금 더 쉽게 다른 일자리를 얻었을 것이다. 개인은 노동시장 구조를 이길 수 없다. 노동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은 사실 허상이다.      


개인이 노력한다고 벗어날 수 있을까

 교육은 천한 노동을 피하기 위한 도구로 알고 있다. 교육의 가능성은 수많은 이들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노동시장과의 연결점에 대해서는 고려치 않는다. 교육제도는 마치 개인만 열심히 하면, 최소한 ‘질 나쁜 일자리’를 모두가 피할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친다. 나도 그렇게 배웠다. 지금도 매달 사교육에 1인당 평균 25만 6천원을 투자한다. 아이가 둘 있는 집이라면 50여만원, 1년이면 한 가정에서 600만원을 사교육비에 투자하는 것이다. 이 큰 돈을 투자하는 이유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노동자’가 되고자 하기에 그렇다. 정확히는 ‘천한 노동’을 피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교육제도로 비정규직을 피하기 위한 우리 국민들의 몸부림을 노동시장구조는 배반하고 있다. 사회는 절반의 노동자가 비정규직으로 살도록 만드는 구조에 있다. 현재 노동계의 연구 결과에서는 비정규직이 45%가량이다. 통계청 기준에서는 33%이다. 10명 중 3~4명이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은 정규직 노동자의 2.8배가 적다는 올해의 통계청 발표는 암울하기만 한 결과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비정규직을 피하고자 하지만, 매년 줄어가는 대기업 고용과 자꾸만 올라가는 공무원 경쟁률을 보면, 누가 비정규직을 피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교육에 투자하여서 개인이 비정규직을 피하는 게 능사가 아니다. 모두가 열악한 환경의 비정규직이 될 수 있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사회적인 투자와 법제화 그리고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일이다. 공부 안하면 ‘사람 노릇 못하는 게’ 아니다. 누군가의 노동을 ‘사람노릇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공부를 못해서 얻는 일이 쓰레기 인 것은 아니다. 우리의 노동가치, ‘저 사람이 공부를 덜 했으니, 그만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허황된 인식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 인식을 갖는 이들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잊는 것은 겁이 없는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서만이 아니다. 불안정한 사회를 위해서라도 비정규직에 대한 인식 개선이 교육차원에서, 제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노동의 가치가 인정받는 세상을 바라야 한다. 또한 만들어가야 한다. 노동가치가 인정받는 세상에서는 피터지게 싸울 이유가 없다. 동일시간-동일 노동이 허락된 사회에서 무리한 입사와 입시 경쟁이 치러질 이유가 없다. 제 아무리 교육 제도가 아무리 발달을 해도, 노동시장 구조가 바뀌지 않는 이상은 누군가는 교육을 많이 받아도, 열악한 처우의 비정규직이 되어야 한다. 열악한 환경의 노동을 안 하기 위한 몸부림이 치열한 교육경쟁을 불러 온다는 사실을 가르치지 않은 채, 교육제도 개선을 위한 노력만 계속되고 있다. 

구별짓기를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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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비정규직 육체, 노동자였다. 내가 일했던 건설현장의 대기업-화이트칼라-정규직 청년들로부터 심한 소외감을 나도 모르게 느꼈었다. 그럴 이유가 없었는데, 그때는 그랬다. 나는 이중화된 구조와 이를 구별짓는 문화 속에 갇혀 버린 인간이었을 뿐이다. 나는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동안 내 노동가치를 인정해보려 했으나, ‘정신승리’로 다른 사람들은 보았다.  우리 사회와 교육은 비정규직의 노동을 가치 있게 여기는 일부터 해야 한다. 그들의 노동은 당연히 ‘값 싸야 하고, 보호받을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가득하다. 비정규직의 문제를 고착화시키자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노동에 대한 가치 인정을 통해서 동일임금-동일노동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노르웨이에서는 대학교수와 청소노동자의 월급이 비슷한 수준이다. 이는 대학 청소노동자의 노동의 가치를 대학교수만큼 인정해주는 사회 분위기 덕분이다. 비정규직-육체노동자 등의 노동가치에 대한 차별은 더 많은 임금, 동일한 노동을 허락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노동가치에 대한 몰이해는 교육제도를 형성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몸으로 체화를 하고 있다. 이 현상은 노동시장의 구조개선, 그 중에서도 노동가치에 대한 적확한 이해 없이는 한국사회에서 계속될 문제다.  노동가치의 구별짓기를 멈추는 게,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다. 노동가치에 대한 인식개선 없는 교육제도의 개선은 허무하게 보일 뿐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하는 일들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이고, 그들의 가치를 올려주는 것에서부터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다. 현재 한국의 노동시장 구조는 이중화와 분절화를 겪고 있다. 우리의 노동시장 구조의 이중화 속에서 ‘외부노동시장’을 피하면 된다는 식의 교육, 그리고 사회 문화는 끝끝내 여러 사람의 목을 죄여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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