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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저너리 Jun 01. 2018

[에세이 10] 그냥 생긴대로 살기로 했다.

난 나일 뿐이야 누구도 나를 대신 할 순 없어

#1

나는 영화를 전공하고 있다. 2017년, 그렇게 지난 1년 간 두 편의 영화를 찍어냈다.

절대 되지 않을 것 같아보였던 것들이, 불가능의 임계점을 넘겨보니 어떻게든 마무리가 되는구나. 라는걸 느꼈다. 그런 상황을 여러번 겪어내면서, 이제 나는 못할 게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조금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 처럼 보였다.


#2

IT 서비스를 설계하는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고, 혼자 이 곳 저 곳 발로 뛰어가며 디자인 공부를 했다.

내가 설계한 것들이, 비즈니스라는 맥락 속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내는 것들이 너무나도 흥미롭게 느껴졌다. 애초에 작가 활동엔 별 다른 관심이 없었다. 돈 벌어다주는 디자인, 유의미한 ROI를 만들어내는 설계를 하는 것이 좋았다.


워낙 변덕이 심한 내 성격을 알기에 '잠깐 헛바람 든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렇게 내 자신을 매의 눈으로 관찰하는 것 부터 시작했다. 디자인이 나의 업이 되면, 학생일 땐 보지 못하는 더럽고 추악하고 힘든 상황들을 많이 마주하게 될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자인을 할 자신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의 답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일부러 나를 극한 상황에 놓았다. 시각화 작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닥치는대로 부딪혔다. 욕심 나는 교육 과정이 있으면 일단 스케줄 생각 안하고 다 주워담았다. 그렇게 쉴 틈 없이 달려나가기만 했다.


연습이라는 맥락을 벗어나 '일'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클라이언트가 있는 작업들을 진행하면서, 얼마나 남의 지갑에서 돈 꺼내오는게 쉽지 않은 것인지 다시 느껴보기로 했다. 그렇게 영화 전공하면서 깨작깨작 배워둔 모션그래픽 스킬로 장사 공부를 시작했다. 지인들한테 말고, 나를 모르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재능 공유 플랫폼 '크몽'에 영상 제작 의뢰 페이지를 열어서 그렇게 나를 내던져보았다.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생활과 병행하면서 동시에 외주를 2-3건씩 쳐냈고,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들 수 있는 날들이 점점 많아졌다.



솔직히 힘들지 않았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이 좋아?' 라고 나에게 물어보면, 아직까진 Yes. 라는 답을 내렸다.


#3

시간이 지날 수록 '잘 파는 것'과 '비즈니스'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져갔다. 그렇게 나에게 닿은 또 다른 물음표.


"이거 결국 마케팅 아니야?"


결국 이 것도 부딪혀보기 전까지는 모른다. 라는 결론이 났다. 그 때 마침 한 스타트업의 마케팅 인턴 채용 공고를 발견하게 됐다. 내가 합격하긴 버거울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지금까지 다져온 것들을 객관적으로 평가받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 '과연 내가 될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신기하게도 한 스텝 한 스텝 넘겨가더니, 결국 합격 해버렸다.


#4

지금까지 잘 해왔구나. 역시 불가능의 임계점을 넘기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존감이 하늘을 찔렀다. 내가 이 회사 히스토리에 한 획을 긋는 사람이 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갖고 일을 시작했다. 나는 지금까지 잘 했으니까, 잘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5

입사 두 달이 지났다. 월급을 받으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힘을 합쳐 일하는 곳에서 나의 역량을 펼친다는 건 혼자 일할때와는 또 다른 맥락이었다. '가깝게는 팀원, 회사의 구성원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에 대한 생각이 나를 괴롭게 했고, 기대치 만큼의 퍼포먼스를 내지 못하는 내 모습이 싫었다.


마케터로서 회사에서 나에게 바라는 그림은 조금 더 활달하고, 미친 생각을 많이 꺼내 놓는 통통 튀는 대학생 인턴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천성적으로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밝아보이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다.


나는 원래 사람을 사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순발력 있고 재치가 넘치는 성격을 갖고 있지도 않다. 점점 더 눈치가 보였다. 내심 1년 정도는 일하고 싶은 마음으로 들어왔는데, 6개월 인턴이 끝나면 바로 쫓겨날 것만 같았다. 아니 내가 못 견디고 제발로 나갈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나 마케터 해도 될까?"


주변을 둘러보니 소위 '힙하고 잘한다'는 마케터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든 생각.


나는 왜 저 사람들처럼 활달하지 못할까?
나도 에너지가 넘쳤으면 좋겠다.
나도 어떤 것의 덕후 기질이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게 내 일이랑 연결될 수 있으면 좋겠다.



#6

한창 괴로움이 극에 달할 때 쯤, 브런치에서 글을 하나 발견했다.



무능력한 자신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마케터에게 필요하다



라는 말이 방황하고 있던 나에게 정말 큰 위안이 됐다. 이렇게 힘들고 괴로운 시간들이 이상한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과정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 =>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 받아들이기



#7

그래, 나 원래 이런걸 어떻게 해.

그래도 괜찮아. 나는 내가 잘하는게 있으니까.


저기 보이는 힙하고 잘하는 마케터들에게는 없는 건

결국 가장 나다운 것이라는 생각이 번뜩 머리를 스쳐갔다.


그냥 생긴대로 살기로 했다. 


끊임 없이 크리에이티브를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 속에서, 결국 가장 창의적인 것은 가장 나다운 것에서 나온다는 믿음을 갖기로 했다. 세상에 나랑 100% 똑같은 사람은 없으니까. 힙하디 힙하다는 주변의 유명한 마케터분들을 잘 살펴보면, 저 분들도 뭔가 대단한 걸 갖고 있다기보단 결국 가장 본인다운 모습을 내뿜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남들의 시선에 굴하지 않고.


그럼 가장 나 다운 건 어떻게 찾아야 할까.

순간 순간 맞닥뜨리는 새로운 경험들에 대한 나의 솔직한 반응을 쌓아가기로 했다. 핵심은 나에게 솔직해지는 것. 사실 별로 안좋은데, 남들 시선 의식해서 좋은 척 하지 않기. 그게 나 다움을 찾기 위한 가장 첫 번째 단서가 되어줄 것 같다.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사소한 것들의 퍼즐을 맞춰나가다보면, '나' 라는 사람의 모습이 크게 그려지지 않을까.




내 취향을 찾기위해 부딪혀보았던 것들

그리고 솔직한 내 감정의 기록


애플워치 
: 와 너무 소중하고 미친듯이 좋아, 는 아니지만 항상 차고 다니고 없으면 허전함. 자연스럽게 내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림
글렌피딕 15년산
: 영화 <소공녀> 보고 너무 맛있어보여서 엄청 기대하고 샀는데, 살짝 돈아까움
사시미와 초밥
: 이 글 쓰기 전에도 단골 초밥가게에서 한 사바리 하고옴. 
매 주 한 번씩은 꼭 가게 된다. 진짜 내가 좋아하는건가봐요.
닌텐도 스위치
: 너무 이뻐서, 게임에 별로 흥미가 없는데도 덜컥 샀다. 젤다의 전설 신나게 하다가 만 12시간 정도하고 질려서 중고나라에 다시 팔아버림. 7만원 손해봤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담에 게임기는 안사야지 빠잉
로우로우 가방
: 신발, 가방 하나 새로 사야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브랜드. 하지만 최근에 오프라인 매장에서의 가방 구매 경험은 매우 불쾌했다. 뚀륵ㅠ 내 마음을 떠나게 하지 말아줘여...
핑구 피규어
: 보고 있으면 어렸을 때 옆집 누나 집에서 핑구 비디오 같이 봤던 기억이 떠오른다. 행복하다. 나랑 핑구랑 닮았다는 얘기도 종종 듣는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




그리고 요즘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


퇴근하고

오류동 스시쿠야 사장님이 썰어주신 사시미 먹으면서

청하 혼술하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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