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의 크루 에세이 03] 나를 바꾼 취미가 있다면?
개인적으로 비속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정당한 상황을 표현할 때에도 비속어가 들어가면 그냥 내 치기와 분노인 것 같고, 우리가 알게 모르게 쓰는 어원들에 대해 들을 때 마다 눈살이 찌푸려져서, 그리고 우선 들으면 내 귀가 너무 피곤해진다는 이유 등으로 의식적으로 지양하는 편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
아무리 비속어가 싫을지라도 아직은 도저히 대체할 말을 찾지 못해서
그리고 그 의미가 너무 강렬하게 와 닿아서 포기하지 못하는 말이 하나 있다.
바로 오늘의 주제 "존버"
'존버' 라는 말에 대한 지지와 애정을 표현하기 이전에 우선 나를 설명하자면 나는 세상 자잘한 재능으로 가득찬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공부도 곧 잘 했고 음악도 미술도 기타 등등의 많은 것들에 적당한 재능을 나타내서 엄마가 학원이나 학교에 가면 "oo이는 재능이 보여서 조금만 하면..."이라는 말로 으쓱해지는 그런 애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는 특히나 반짝거리는 것들이 있었는데 음악, 글, 토론 등 내가 거쳐간 전공들과 꽤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것들이다.
"존버"를 말하며 내 성향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러한 나의 재능이 슬슬 단점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낀, 즉 재능형 인간이 마주치는 한계를 느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적당한 재능형 인간은 어릴적 사랑받기가 참 편하다. 내가 재능 있는 분야에서는 조금의 노력으로 많은 결과를 얻을 수 있고 우위를 점할 수 있으며 그로인해 집단에서 별 노력 없이 하나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래서 "노력"의 의미를 깨닫기가 참 오래 걸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노력을 하지 않고 재능으로 다 커버될 만큼 엄청난 재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악바리 같은 성격은 어릴 적부터 여전해서 꽂히는 무언가를 하기 위해 밤을 새거나 무리하게 나를 갈아넣는 것은 내개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고 분명 이로 인해 나는 "노력"의 의미를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내가 미흡한, 즉 재능있지 않은 분야에서 "잘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을 깨닫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은 경험에 의존하는 동물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기에 누구든 내가 잘 하는 것을 위주로 강점을 키워나가고 그것이 편한 길이라는 걸 알기에 쉽게 그 길에 들어선다. 내게는 음악이 그랬고 글이 그래서 사실 큰 고민보다는 효율성의 측면에서 전공을 선택해왔다. (물론 당시에는 치열하게 고민했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결국 눈 꼭 감고 내 손에 익숙한 연장을 든 것 같은 선택이었다.)
그리고 이런 나를 변화시킨건
누구나 하나쯤 지표로 삼는다는 좌우명도, 유명한 강연이나 영화도 아닌 바로 "취미"였다.
사람들이 취미가 뭐냐고 물어보면 매번 상황에 따라 답이 바뀌던 내가 하나의 취미에 정착하게 된 계기는 의외로 단순했다. 학부 2학년, 한참 전공 공부에 열을 올리면서도 도서관에 틀어박혀있던 생활이 답답하던 나는 친한 언니와 함께 학교 근처 운동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것이 바로 "댄스 스포츠 동호회"
언니는 수강 신청에 실패하고 혼자 떨어진 그곳은 아직도 세간에 깔려있는 선입견과는 무관하게 정말 운동과 춤, 음악을 좋아하고 열정적으로 임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음악은 좋아해도 체력장 만년꼴지 몸치에 좁고 깊은 관계에 익숙하던 내게 그 곳은 매일 노력해야 할 것들로 가득했다.
다른 사람은 십분이면 배우는 스텝을 일주일이 되도록 감도 못 잡고 있는 나,
뒷풀이 자리에서 친한 지인들 옆에만 콕 붙어 있던 나에겐 동호회는 매일이 큰 마음을 먹고 가는 곳이었다.
잘 하는 분야에서 쉽게 주목받고 사랑받았던 터라 못 하는 것들로 가득한 세계에 던져졌을때의 비참함은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매일 강습장의 지하계단을 내려가며 다시 집에 갈까를 고민한 시간이 3개월쯤 되었을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공연팀 크루로 본격적으로 발을 들였고 그렇게 눈 깜짝할 2년 반의 시간이 흘렀다.
각종 공연에 대회를 나가고 파트너 버프, 운과 조금씩 늘어가는 실력으로 좋은 성과를 거두면서 어느 새 나는 내 취미를 사랑하고 나름 "잘 하는"사람이 되어 있었다.
(동시에 영혼의 동반자 같은 가장 친한 친구,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지인들을 만나 힘든 시기를 버텨온 것은 어쩌면 위에 긴 이야기를 통해 나열한 성과보다 소중한 것 같다.)
내가 동호회에 들어가서, 내 20대 초반을 가득 채운 취미를 찾으며 가장 크게 배운 것은
바로 못해도 "존버"하는 것이다.
나처럼 재능이 자잘한 사람들은 포기가 참 쉽다.
내가 잘 하는 일로 돌아가면 몸도 마음도 편한데, 내가 왜 여기서 시간과 돈을 투자해가면서 이 개고생을 하고 있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누구보다 쉽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랬다. 어디가서 노래라도 부르고 글이라도 쓰는 취미반을 다니면 나는 큰 노력 없이도 행복할텐데 라는 생각이 강습장의 탈의실에 쪼그려 앉을 때마다 들었다.
하지만 내가 못해도 하고 싶은 곳에서 "존x 버티면" 사랑하는 것이 생긴다.
찌질하고 질척하게 내가 나인듯 내가 너인듯 그렇게 지지고 볶고 뒹굴다 보면 못 하는 것도 적당히 하게 되고 적당해 질 쯤 애정이 생겨 결국 사랑하게 된다. 취미를 통한 나의 이 교훈은 요즘 갈대처럼 흔들리는 내 마음을 붙잡아주고 있다. 지난 에세이에서도 말했듯 나는 아직 행복하다고 말할 수가 없고 내 삶을 온전히 녹이고 싶은 어딘가를 찾아나가고 있다. 그리고 참 신기하게도 나의 주변 소중한 이들 중 다수가 그렇다.
요즘 내가 이 여정에서 가장 힘든 점은 바로
내가 이 구역의 재능 깡패가 아니라는 것. 전공도, 스펙도, 쌓아온 경력과 삶의 방향도 이 업계에서 나는 "재능군"에 속하질 못한다. 오히려 과거의 여정이 재능이 된 주변인들을 보며 부러워하는 그런 종류랄까.
비교당하고 스스로 비교하며 "나는 이 업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일까?"를 매일같이 고민한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한번 버텨본 경력, 즉 "존버"의 시간이 나의 새로운 경력이다.
엑셀이고 예산이고 기획이나 영어, 메일, 커뮤니케이션 등 어렵고 복잡한 것들은 투성이지만 감사하게도 나는 지금 '적당히' 의 과정으로 넘어가고 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내가 너인지 네가 나인지 모르겠는 시간을 버텨내고 지금 가는 삶의 방향과 사랑을 하게 될지 추억을 남기고 뒤돌아설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그래도 우선은 너무 사랑하고 싶으니 올해 나는 존버 할 생각이다.
요즘 YOLO라는 말이 쉽다.
어떤 의미에서 이 말은 나에게 과감하게 전공을 버리고 , 즉 익숙하고 잘 하던 것을 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오게 해준 말이다. 하지만 가끔 이 말이 '힘들면 굳이 버틸 필요없어, 다 놔버려도 돼'라는 자기합리화로 다가올 때가 있다.
그래서 그 말에 갈대처럼 흔들리던 지난 한 해를 뒤로한 채 올해는 죽어라 버티는 해를 살아보고자 한다. 지금 더 이상 즐기진 않지만 후회 없이 나를 쏟아부었던 취미처럼, 뒤돌아 봤을 때, 그 추억으로 내 배를 채우게끔, 그리고 존버의 교훈처럼 삶의 지팡이로 삼고 나아갈 어떠한 교훈 하나쯤 안고 갈 수 있게. 그리고 그러다 혹시 운이 좋으면 그 삶과 눈이라도 맞아서 더 큰 어느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그러니 만약 이 글은 읽는 당신도 YOLO 라는 말에 내가 흔들릴까, 그 말을 곡해할까 무섭다면 나와 같이 올 해 무언가 하나 "존버" 해본다면 좋겠다.
비저너리의 크루 에세이 시즌 2부터는 비저너리 달력 뒤에 있는 그 달의 질문 중 하나를 골라한 주에 한 번, 월요일 아침, 크루들의 진솔한 답변으로 채워 나갑니다. :) 이 글을 보시는 여러분들도 바쁜 일상 속 생각에 잠기실 수 있도록 최근 한 달(5개)의 질문들을 공유합니다. 그리고 이번 한 주는 다음 질문 중 하나를 깊이 생각해보면서 어딘가에 답해 보는 시간을 갖는 건 어떨까요?
-Music-
가사가 딱 내 이야기인 것 같은 노래가 있다면?
나의 힘든 시기를 함께 해 준 음악이 있다면?
당신의 상반기를 표현할 수 있는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보세요.
-Hobby-
경제적인 제약 없이 딱 하나의 취미만 배울 수 있다면 무엇을 배우고 싶나요?
새로운 당신을 발견하는 취미가 있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