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감독

맥스웰 몰츠의 성공체험; 자아를 깨워라

by 박 찬

축구 감독

이 타운이 가을이 되면 매년 시(City)가 주관이 되어 유년부터 고등학생까지 각각 나이에 맞추어 축구팀 동아리를 만든다. 그도 그럴 것이 시에서 일 년 내내 그 많은 공터를 깨끗하게 때가 되어서 잔딜 깎아 치장을 했는데 당연히 프린스톤시 주민들이 그 잘 깎인 잔디를 사용할 길 바랬다. 올해도 여지없지 가을이 들어서자 공립학교를 통해서 연중행사가 돌았다. 아이들이 팝프렛을 들고 와 내 친구도 들어갔으니 자가들도 가야겠다고 졸라댔다. 해서 막상 도착 보니 축구시작도 전에 자원 봉사자를 찾고 있었다. 어린아이들 축구엔 축구 감독할만한 사람들이 없었다. 이때가 90년도 말 그러니까 미국이란 나라가 축구를 잘 모를 때였다. 수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려와서 그 넓은 푸른 초장에 예쁜 유니폼을 입혀 보내기만 했지 누구 하나 봉사자로 선득 나설만한 사람들이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축구해 본 미국 아빠도 없고 축구에 "축"도 몰랐다. 그런 그들도 슈퍼볼(Foot Ball)할 때쯤 되면 미식축구식 빠져 식음을 전폐할 정도였지만, 축구(Soccer)는 또 달랐다. 이걸 어쩌나? 회사도 그렇고, 그 새로 산 집이 너무 커서 집엔 할 일도 많아서 그냥 아이만 내려놓고 들낙 날락 하려 했었다. 누구가 나서야 할 것 같았다. 난 이런 일에 절대 나서야 한다는 철학이 있다. 일주일 두 번쯤 훈련시킬 수 있는 코오치, 말이 코오치지 그냥 나와서 애들하고 같이 놀아주는 베이비시터(Babysitter)정도였다. 잘 계산을 해보니 요쯤 같은 회사 분위기엔 하루 정도는 한 시간 일찍 나오고, 나머지 하는 어차피 주말이니 문제가 되질 않았다. 그래서 자원봉사 코오치로 큰애와 작은 애 있는 팀에서 봉사하기로 나섰다.

간단한 인터뷰가 진행됐다. 추체 측 체육 전문 선생이 나왔다. 키가 건장한 친구가 질문했다. 축구해 봤냐?는 질문부터, 몇 개를 용어를 물어보고, 그중 오프셋란 용어도 물어보았다. 대답을 잘했더니 그도 흡족한 표정이었다. 서로 악수를 나누고 일을 돕는 것에 동의했다. 어쨌든 졸지에 코오치옷을 입고 우리 팀을 훈련시켰다. 내 팀은 큰아이가 있는 팀이었다. 훈련이란 게 그냥 볼을 돌어 가며 차고, 한 번은 드리블하고, 소리도 질러보게 하고, 그저 한가롭지 않으면 되는 일이었다. 난 애들하고 놀 때 절대 지루하지 않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하여튼 재미있게 연습을 했고, 부모들 아주 대만족이었다. 주중에 한 번은 자체 연습과 그 주말엔 다른 팀 하고 리그로 경기를 하고, 18팀주에 최대 다수로 이긴 4팀이 토너먼트식으로 마지막결승을 뽑는 거였다. 말하자면 형태는 월드컵랑 비슷했다.

아이들 수준이 가관이었다. 이 아이들은 축구 한번 한 적도 없거나 아예 본 적이 없는 정도였다. 어떤 아이들은 손으로 공을 잡기에 바빴다. 다시 말하자면 그냥 나온 거다. 그래서 일단 손을 못 대는 것부터 시작하는 기본룰, 다섯 가지만 설명했다. 그리고 부모에게 다음 주에 올 때까지 유튜브에 있는 경기 한편씩 필히 보고 다시 만나자고 했다. 시간이 지난 둘째 모임이 있었다. 우리가 경기하는 날이었다.

그때가 11월 첫 주말인데 가랑비 같은 눈이 오고 있었다.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런 기이한 현상을 보고 있었다. 이 정도 시즌에 미국에 온 이후에 나도 이렇게 오래 동안 밖에 나와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우선 가볍게 몸을 풀었다. 드디어 경기기 시작되었다. 중앙에서 우리 팀이 우선 볼을 찼다. 볼이 오면 모두 다 와르르 몰려다녔다. 저쪽으로 차면 와르르 이쪽 차면 와르르 이쪽저쪽으로 몽땅 골키퍼 빼고 20명 모두 몰렸다. 이거 아군도 적도 없는 아수라장 속에서 모두가 하나의 팀 되고 있었다. 우리 골키퍼는 애를 몰려다니는 걸 보느라고 아예 골대조차 지키지 않았다. 혼자 보기에 아까운 축구팀이었다. 근데 이런 팀들의 공통점은 서양이나 동양이나 항상 한결 같이 유니폼만 최고로 좋다는 거다. 모두 최상에 유니폼에 최상에 신가드에, 반짝반짝 빛나는 최상의 스피이크 신발들이었다. 잡표는 아예 경기장에 볼 수가 없었다. 몽땅 브랜드로 위아래를 발랐다. 부모들은 재미있는 모양이다. 깔깔 대고 웃고, 응원하고 자기 얘 이름만 연신 불러대곤 했다. 근대 난 코오치라 재미도 있어야지만 게임도 이겨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전반전이 끝나고 스코어는 3대 4로 우리가 뒤져 있었다. 상대방팀 한 애가 드리블을 잘하는데, 우리 애들이 막질 못했다. 그런데 우리 팀 중엔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서 있기만 한 녀석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이아이는 도대체 다른 애들하고 함께 움직이질 않았다. 아마 정신이 집중이 안 되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아이들처럼 볼이 오면 볼을 쫒은 게 아니고 볼과 전혀 상관없이 그냥 주변을 껑충껑충 뛰여 다니기만 했다. 그 얘 이름이 자쉬어이였다. 휴식 중엔 물을 마시고 작전을 짜야하는데 작전이란 게 뭐~ 먹혀들어갈 팀이 아니었다. 상대 팀 코오치는 이기고 있었기 때문에 힘이 빡빡이 들어가 이었다. 땅바닥에 뭘 쓰면서 소리 지르고 "으싸" "으싸" 힘을 붇돗고 있었다. 나는 후반전 경기에 들어가려는 자쉬아를 불렸다.

"자쉬어"

"으응 코오치"

"내가 숙제 하나 줄게"

"할 수 있을 거야, 난 자쉬어가 할 수 있다고 믿어"

( 침묵………….)

그리고 자쉬어한테 귀속말로 몇 마디 해 주었다

"알았지, 자쉬아"

그 앤 알아 들었나? 그냥 별 대답이 없이 걸어 들어갔다. 난감은 했지만, 어쩌냐? 나도 이런 팀을 처음 경험했었는데, 어쨌든 간에 시간에 되어서 경기가 시작되었다. 난 이 후반전 동안 자쉬어 이름을 한 100번 하고 그 이상을 불러댔다.

그 애이름이 불려질 때마다 그 애는 다시 움직였다. 내가 귀속말로 전해준 그 아이의 미션은 제일 잘 드리블하는 그 상대팀 아이 옆에서 그냥 껑충껑충 뛰기만 하는 거였다. 그 아이가 드리블해도, 아님 가만히 서있어도 그냥 그 애 옆에 껑충껑충 뛰라고 했다. 그랬더니 상대팀 아이도 드리블이 그리 훌륭하지 않았는데, 자쉬어가 껑충껑충 뛰니 몹시 당황해하는 모습이었다. 워낙 우리 편이 엉망이라 그 아이의 기술이 뛰어나 보였다. 그 아이는 앞에서 훼방을 놀고 있으면 드리블을 못하고 쉽게 볼을 상대방에게 내주었다. 그 후론 늘 볼이 우리 편이 항상 있었다. 그 시합이 끝나고 우리는 간신히 7:7로 타이로 끝났다. 결코 나쁘지 않은 출발이었다. 우린 계속해서 자쉬어가 잘해주는 덕분에 승승장구했다. 이 아인 껑충껑충 뛰는 게 아니라 나중엔 아예 주변을 토끼처럼 주변을 돌았다.

자쉬어는 집중력 장애자(ADHD; 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이였다. 미국엔 장애자들이 살기 가장 편한 천국이다. 미국엔 이런 유의 장애자들이 유독 많은 건? 수많은 다른 인종이 다른 피가 섞여서인지? 아님, 병명이 알려지니 유난히 그 숫자가 드러난 건진? 알 순 없지만 여기저기에서 다반사로 만나는 환자들이었고 창피한 일도 부끄러워야 해야 할 일도 아니었다.

그 후에도 우린 계속해서 훈련과 경기을 번가라 가면서 치워 냈다. 한 명의 부상자도 없었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한 6개월 정도 지나고 드디어 결승 엔트리 4팀을 소개하는 거였다. 아~ 거기에 우리 팀도 들어가 있었다. 모두 기뻐했다. 그리곤 이제부턴 담당가 코오치 한 사람을 더 붙여서 두 사람을 주는 거였다. 우리 팀온 새로 온 코오치 다름 아닌 즉 날 인터뷰하던 체육선생, 짐이었다. 나는 그가 들어와서 우리 팀에 힘을 실어 주길 기대했다. 그는 이 대회에 진행 행사 위원이기도 해서 많을 걸 그가 관리하고 있었다. 그래 가끔 간식도 우리에게 좀 더 빨리 먹고 뛸 수 있게 혜택을 주웠다. 첫 번 준준 결승전이 시작이 되었다. 난 그전에도 눈여겨 남의 경길 지켜봐 오던 중이었다. 그래서 상대팀의 스트라이터가 대충 누구지 알고 있었다. 난 우린 팀을 재 분류하기로 했다. 가만히 보니 우리 팀은 세 가지로 분리가 되었다. 볼이 오면 무조건 들고뛰는 막가파, 또 하나는 볼이 왔을 때만 겨우 움직이는 귀족파, 나머진 어디에 놔도 제일을 감당 못하는 자쉬아 같은 장애파였다. 그래서 자쉬아 같은 부류는 상대방 제일 잘하는 스트라이커 옆에 붙여 주웠다. 귀족파는 풀백 으로 두고 어제든지 볼을 몰고 오면 상대방에게서 절대 볼을 빼지 말고, 거리만 유지하다 찬스가 오면 무조건 반대 방향으로 차내거나 아니면, 라인밖으로 처 내도록 지시을 했다. 드디어 경기장에 들어갔고 우리 팀은 잘 싸워 주웠다. 자쉬아가 제일 많이 뛰어다녔다. 상대방 스트라이크한테서 한골도 나오질 않았다. 자쉬아는 상대방 아이가 우리 진형에 있으면 우리 진형에, 그 상대아이가 상대방 진형에 있으면 그쪽 진형에 있었다. 한땐 그쪽 상대 골키퍼가 자쉬어가 있는지도 모르고 자기 골대 옆에 서있던 스트라이커한테 볼을 건네 주웠는데…. 자쉬어는 참 신사였다. 그걸 가로채질 않고 그 아이옆에서 껑충껑충 뛰고만 있었다. 전반이 끝났다 스코오는 3: 1로 우리가 이기고 있었다.

그때쯤 시합시작 행사에 바빠던 임원 코오치, 짐이 들어와서 날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바로 애들을 지시를 했다. 나는 속으로

(” 이 친군 참 무례군”)

하고 중얼거렸다. 키가 너무 커 축구에 좀 맞지 않은 체격이었고, 주로 학교에서 배운 축구에다, 고교생을 가르치는 식으로 참 거친 주문을 하는 거였다. 아이들은 후반에 투입되었고, 경기는 곧 시작되었다. 주문을 새로 받은 애들은 약간의 혼동이 있어 보였다. 얘들은 전혀 새 코오치 의도하는 방향과 전혀 반대 방향으로 경길 했다. 분명히 아이들이 새 코오치 주문을 못 알아 들었다. 내심 참 잘 됐다 생각했다. 선생코오친 얼굴이 누르럭 푸루럭 말이 아니었다, 난 연신 자쉬아만 불려 댔다. 결국 이 힘든 경기 중에 그 스트라이커를 두 번 놓쳐서 2골을 먹고 3:2로 끝났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이겼지만, 전반전에 3골을 안 넣었으면 큰일 날 뻔했었다. 조금 있다 결승전에 시작될 판이었다. 보모들은 흥분하고 날리 법석이었다. 부모들은 축구에 대한 지식이 없어 그냥 스코어가 모든 걸을 그들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경기 내용에 전혀 상관하지 않았고 자쉬아가 그렇게 팀에 헌신한다는 것도 알 수 없었다. 결승이 시작하기 전 선수를 다 모았다. 선생코오치가 나랑 얘기 좀 하자고 날 부른다

"존 선생님, 난 이경기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요"

"근데 아까 경기 보니 당신이 소리치는 소리 때문…"

"당신이 헤드코오칠 하겠다고"

"그래요"

"그럼 당신이 잘할 수 있다는 그 이유가 뭐죠?"

"나는 체육 교육 과정을 정식을 수료……. 나~ ㄱ~ ㄷ~"

체육과정 얘긴 그다음부터 잘 안 들렸다. 속으로 나 중얼거렸다

("이놈아! 내가 체육과는 안 나왔어도 동네에서 걸음마 때부터 배운 게 축구다")

"그리고 주정부 축구대표팀에서도 뛰었고 ….. 나… ~"

또 주정부 축구팀 얘기 할 때부터 귀에 또 안 들렸다. 난 속으로 말하고 있었다

(" 난 소실적부터 TV를 품에 끼고 배운 축구다. 인마~” )

그래서 난 월드컵이든 아시컵이든 축구할 때면 제일 TV화면에 바짝 붙어서 볼 잡은 선수와 대화를 했었다. 그러면 또 말했다 속으로……

(“혼연일체로 혼연일체가 뭔지 네가 아냐?")

아! 이 친구는 한치도 물러나지 않는 게, 자기 자랑의 전주곡을 다할 모양이었다

"잠 까~ 안"

"잘할 수 있습니까?"

"예스"

"오케이"

"얘기했듯이 우리가 함께 주문하면 혼동이 옵니다"

"오케이 내가 조용하지"

내가 헤드코오치에서 물러나 가로 했다. 그래야 일이 빨리 끝낼 거란 생각을 했었다.

"탱규"

그래서 아주 짧은 시간에 논쟁은 끝이 났다. 나는 짧게 요령 있게 말을 자르고 결론은 내렸다. 왜냐하면 이건 팀플레이기 때문에 빨리 이 친구하고 분쟁을 없어야 우리 애들이 잘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동양인인 나는 전체를 살리자는 공동체 철학이고 이 미국친구는 절호의 결승전에서 자기의 영향을 발휘하고픈 철저한 개인주의 철학이었다. 이럴 때 싸우면 얘들이 이 죽은걸 난 알고 있었다.

"그 대신 애들 다치치 않게 요령 있게 합시다"

"오케이"

부모들은 우리의 대화에 긴장하는 듯했다. 내가 다시 웃은 얼굴을 보고는 안도하는 듯했다. 난 부모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나는 애들 있은 쪽으로 갔다. 이 친구가 보드에 매직잉크로 그린 커다란 종일 놓고 침이 튀겨가며 얘기했고 아이들이 종이위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튼 그 친구 열정은 대단해 보였다. 준비도 많이 해 왔었다. 드디어 경기가 시작했다.

이 친구는 계속 애들에게 주문했다

"전원 앞으로"

"거기서"

"마틴 뭘 하는 거냐"

"뛰어"

나는 그걸 보고 있으면서 한마디도 안 했다. 그게 애들을 돕은 일이 일이었다. 애들은 넘어지고, 자빠지고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어 어느 때보다 열심히 우리 진형과 적진형을 넘나 들었다. 경기 시작 후 서로의 팀이 팽팽하게 타이를 이루고 있었고 그 균형이 한 동안 지속 되었다. 상대팀은 두 명이 스트라이커가 있었다. 근데 자쉬아는 구분 못하고 그냥 그 둘을 왔다 갔다 연신 껑충껑충 뛰고 이었다. 결국 우리 귀족들이 사람을 잡으려다 구멍이 뚫렸다. 여지없이 오른발의 강한 킷이 날아들어왔는데 우리 골키퍼 샘이 못 막았다. 그때가 전반 종료 전까지 7분이 남아 있었다. 그 후에 지친 우리 팀이 멀건히 쳐다보다 한 골 또 먹었다. 2:0으로 전반 전이 끝났다. 들어오는 아이들이 몹시 지쳐있었다 나는 물을 갖다 주면서 하나하나 등을 토닥거려 주웠다

"잘했어, 자쉬어!"

"정말 수고했어, 조"

"힘들지, 샨"

"파이팅 그레이트"

애들은 얼굴엔 패색이 짙게 깔려 있었다. 선생 코오친 여전히 열정을 가자고 또 보드에 침을 튀기고 있었다. 그리곤 다시 후반전 경기로 내 몰았다. 후반전 나가 싸웠지만 중과부족이었다 결국 그 경기는 7:1로 여지없이 졌다. 아이들은 몹시 피곤해했지만 내 눈엔 장해 보였다. 그 무지렁이 팀이 결승까지 올라갔다는 사실이 장했다. 부모들은 나에게 와서 연신 고맙다고 하고, 어느 부모는 이 허허벌판에 어디서 어디서 가져왔는지 내게 고디바 초콜릿에 감사 엽서까지 주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부모들이 날 뺑둘러 쌓고 있었다

"감사했습니다 존 선생님".

"뭘요! 저도 즐거웠습니다"

그러다가 선생 코오치, 짐이랑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날 보더니 어깰 으쓱하는 것이었다. 난 미국사람, 여기선 미국 놈이라 편이 더 낫다. 이렇게 “어쩌라고?”하는 식으로 으쓱하는 행동에 나는 아주 별로다. 내 친구가 영주권 스폰서 해 주겠다고 해서 닭농장에서 닭똥만 3년을 치우게 하더니 3년째 되는 날 뭐가 잘 못되어 영주권을 못해주겠다고 할때도 어깨만 한번 으쓱댔단 말을 들었다. 난 그 말을 들은 이후부턴 누구든지 그리 책임감 없이 으쓱대는 걸 이주 싫어하게 되었다. 내 프로젝트를 자기 더 잘할 거라고 내 상사를 꼬드여서 가져간 다음에 다 망쳐놓고 나에게 되돌려 주면서도 그놈의 어깨가 한번 으슥 내미는 것 등등이 나에게 그렇게 곱게 보이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 으쓱 참말로 한국이었으면 이런 놈들은 사달이 났어야 했을 것이다. 속으로 말했다.

( "너 같은 놈은 한국에 있었으면 한참 맞았을 거다. 이 녀석아")

참 억울했지만 오늘은 이 정도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중얼거렸다.

"으흠 개인주의"

이렇게 흥행이 된 축구가 우리가 사는 프린스톤에 십여 년이 지나서 축구엄마( Soccer Mom)이란 유행어로 돌아왔다. 이 뜻은 어린애를 멋있는 지프차에 태우고 이 축구장에서 저 축구장으로 애들을 데리고 다니는 잘 살고, 이쁘고, 활동적인 엄마를 일 커는 말이 되었다. 쉽게 말하면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분류의 엄마들을 말하는 건데 여긴 뇌물은 주지도 받지도 않는다. 단 고디바 초콜릿은 받는다. 그리고 참고로 십 년 전에도 나에게 고디바 초콜릿을 준 여자기 있어고 이뻤다. 근데 손자를 데리고 나온 손등에 유난히 주름이 많았던 할머니였다. ㅎㅎㅎㅎ

요즘은 축구코치가 머릴 곱게 무쓰를 칠하고 진한 향수냄새를 품기며 축구장에 나는 것이 무슨 의도인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미국은 그 사이 많이 바뀌었다. 월드컵을 보니, 이 짧은 시간에 이렇게 급성장하는 게 믿기질 않을 정도였다. 어째든힘 있고 탄력 있는 나라임에 분명했다. 이번 2014년 월드컵대회에 미국 16강에 들어간 거였다. 미국 사람들은 미국 대륙을 진동시켰다. 골키퍼를 하던 팀 하우어드( Tim Howard) 선수은 미국 대통령으로 추대해야 한다고 페북을 몽땅 회칠하듯 한적 있었다

여기 스포츠 바가 있다. 이곳은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대형 스크린으로 경기를 보면서 음식과 간단한 음료도 할 수 있는 곳이다. 가족 동반 또는 주로 혼자 오는 사람들이 여기서 만난 같은 편끼리 같이 응원도하고, 친구도 만들고 하는 곳이다. 난 2014년 우리 대한민국이 16강전에서 러시아랑 할 때 가족을 다 데리고 스포츠바로 갔다. 평상시에 난 화면에 붙어서 소리 지르던 처지라 나에게 이처럼 좋은 데가 없다. 평상신 소수민족이었다가 축구만 하면 난 이 레스토랑에 스포트 월등 국민의 특권을 누린다. 이렇게 정신없이 응원하면 같이 보던 미국인들도 나의 열정에 존경한다. 왜냐하면 미국은 스포츠 나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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