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웰 몰츠식 성공체험; 자아를 깨워라
2장. 실패; 퀄리낙방
오늘 여기에 실패를 쓴다. 그 이유가 있다. 실패엔 늘 정보가 남게 되어 있다. 이 실패한 그 정보를 수집해서 잘 분석을 한다면 그다음에는 개선안이 나오는데 많이 이들이 유용한 줄 알지만 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뭘까? 그 이유는 실패를 뒤집어 직시를 해야 할 때마다 그때의 아픔도 함께 부상하기 때문이다. 나는 화학 연구실에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이런 오류를 분석하는 일을 평생 했다. 그 실패내력은 다음에 어떤 시도를 할 때 기초공사와 같이 건설적인 재료가 되기 때문에 이런 실패의 정보는 실험실에선 아주 유용하다.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이라면 공부하는 데도 적용할 수 있고, 창업을 준비하는 창업자에게는 이런 실패를 잘 수집해서 분석하는 것은 중요하며, 또 일반 회사 생활을 하더라도 그러한 정보들은 유용하다. 특히 타인이 남겨주는 실패한 데이터는 자기 자신 자기에게 투영만 하더라도 새로운 돌출구를 찾아낼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옛날부터 얘기할 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성공하려면 이런 실패한 데이터가 축적되어야 어느 날 성공에 이르게 된단 얘기다. 그렇다고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해서 반드시 실패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실패한 사건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즉 멘붕이 왔다. 그러니까 쫄딱 망했다는 실패의 감정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접근해야 한다. 수집하는 과정에서 실패의 정보 수집과 실패의 감정 밀착은 분리되어야 한다.
이걸 웹작가들이 많이 사용하는 '1인칭 조연'역할이 있다. 이 역할은 주인공을 적나라게 묘사하되 소설의 펜대를 쥐고 있기 때문에 1인칭 조연은 절대 죽지 않는 불사조이고, 글을 써야 하기에 아무리 장면이 험악해도 안전한 글방에 앉아 있다는 걸 잊지 않으니 더 적나라게 묘사한다. 나의 경우에는 임상이라는 걸 많이 하면서 연속적으로 마지막 실험이 성공될 때까지 노트를 써야 했었다. 아침이면 여지없이 노트를 쓰고 저녁이면 노트를 접고 집으로 간다. 그다음 날은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행위를 하지만 방향은 다르다. 그 노트 중에 하나만 성공노트이고 나머지 999개는 실패한 테이터를 모은 노트이다. 그만큼, 천 개 중에 한 개의 성공을 위해서 그 실패자료가 나에게 필요했다. 그 실패자료가 오늘 있어야 내일 어떻게 실행할 것인지 방향을 예견할 수 있고, 어제 실패한 데이터를 피해야 오늘 성공 데이터 한 개를 찾을 낼 수 있으니 실패는 아주 중요하다.
우리도 이런 실패를 그러한 실험실에 있는 임상 테스트정도로 생각할 수만 있다면 실패는 절대 우리한테 아픔을 주거나 또 우리를 실망시키거나 우리를 좌절시키지 않는다. 실험실에 있는 과학자가 자기가 시도한 실험이 실패를 했다고, 그날 밤 목숨을 끊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실패 노트를 쓰고 나선 자료 분석용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과학자는 오늘의 실패를 기반으로 내일 어떤 반응을 일으켜야 되는지? 그 아이디어를 만들어야 하는 목표가 있었기에 오늘의 실패는 차라리 그들에겐 기쁘다. 내일은 같은 걸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즉 시도의 데이터가 되는 것이지, 실망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 쌓이는 데이터와 누적되는 실망이란 감정..... 참 말은 쉬은데 사실 어렵다. 그러나 이런 일조차도 결국 자신의 선택이다.
원효대사의 일체유심조와 같아서 해골바가지에 괸 물이 막걸리인지? 썩은 물인지? 생각하는 쪽으로 서로 다른 결과물을 얻게 된다. 그걸 깨우치고 나서 행함이 다를 것이고 그 행함으로 얻는 결과물은 더 큰 차이가 난다. 요강공주를 취했던 원효대사는 이두문자를 창시한 설총이란 걸쭉한 인물을 낳았지만 그 당시 먼지 나는 법문공부만 했던 유명한 사파대사는 위키에도 알려진 바가 없다. 전자는 우리에 영향력이 있고 후자는 없다. 그러니 이 글을 쓰는 내 사무실 안에 고시를 공부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친구들도, 취업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있다. 물론 시험이 되었면 좋겠지만 혹여 낙방이 된다 하더라도 감정을 배제하고 자료로 삼아야 한다. 실패 또는 성공 등등은 과정에서 일어나는 부산물일 뿐이다. 그런 실패도 성공도 동일한 마음자세로 직시만 할 수 있다면 그냥 과정일 뿐인걸 알게 된다. 단 우리의 꾸준한 시도는 우연한 성공보다 훨씬 귀하다는 것만 알면 된다.
퀄리 낙방
“아이코”
“아아아~”
“크~, 아우 이거 정말”
이렇게 미국사회에 살아남기 위해서 학교를 들어왔었는데 이 학교에서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다. 나의 마지막 퀼리 시험이 낙방했기 때문이었다. 이 스트레스로 나의 몸에 이상이 왔다.
나는 위장, 즉 소화력엔 거의 문제가 없는 사람이다. 뭘 먹어도 잘 소화했다. 옛날부터 먹는 걸는 아무거나 진짜 잘 먹어서, '위장은 돼지의 위장이다'라고 의사 선생님이 얘기하곤 했었다. 위장은 그렇게 튼튼해도, 문제는 장이 좋지 않았다. 내가 박사과정에 있었는데 박사과정 중에 퀄리시험을 붙어야 논문을 쓸 자격을 주었다. 해서 우리 퀄리라 불렀고 - 시험 즉 쿼리피케이션(Qualification), 박사자격시험의 줄인 말이다.- 이 퀄리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목숨 걸고 하다가 이게…… 어찌 시험에 떨어진 사실이 나한테 엄청난 고통으로 돌아왔다. 이게 내 생애 마지막 찬스였던 처럼 보였다.
퀼리 시험 한 3개월 전에 열공하던 어느 날 내가 초대를 받았다. 분과 초를 나누어 쓰던 있던 그때에 초대를 받아서 갔던 곳인 한국에서 교수님들이 오시는 자리였다. 간헐적으로 졸업을 앞둔 좋은 대학의 박사학위자를 인터뷰하러 오는 일련의 행사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오신다는 자리에 가서 목도한 것으론 진짜 한국교수가 되지 말아야겠단 결정을 내리는 시간이 되었다. 그 교수들이 와서 술을 먹고 뭐를~ 하면서 작태를 부려도 학생들은 그걸 다 받아줬다.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는데 거의 사환 수준이었다. 그러니까 학생들의 인격이 한국 교수 앞에선 거의 없었다. 교수들은 그걸 즐겨하는지 아니면 뭘~ 하는지, 그 사람들의 머릿속에 뭐가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 유학원 학생들을 거의 자기 수하처럼 취급하고 그다음에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서 막상 기다리고 있으면 하지도 않고, 털털거리면서 돌아가는 그 모습들이 너무 추해 보였다. 그들은 한국 지성의 최고급의 대접을 받고 있던 사람들이었고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사람들이 외국에선 그렇게 행동했다. 그 사람들이 박사졸업예정자들에게 보장한다는 것이 대학에 교수 자릴 어찌 마련한다는데……실제 하지도 않으면서 말로만 그랬다. 그 학생들 앞에서 자기가 감당 못 하는 술 먹고 해롱 해롱대고…… 해놓는 뒤에 가서 닦아줘야 되는 별짓거리를…… 내 동료 학생들이 하고 있는 걸 보고 있던 나는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리고 생각했다.
난 독한 마음을 품고 공부를 하던 사람이었다. 이런 걸 여유스럽게 받아 널길 정도의 여유가 내겐 없었다. 심하다 싶을 정도로 공부를 놓지 않는 것은 이미 미국에 오면서 망가져 있었기 때문에 공부하면 뭔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희망으로 공부를 놓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서 못마땅해도 나는 간헐적으로 우리 뉴욕 맨해튼에 있는 장인의 비즈니스를 도왔다. 그 비즈니스가 다른 게 아니고 길거리에서 좌판 위에 짝퉁이를 파는 길거리 상인이다. 그 길거리 장인 어르신을 돕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나한테 전철 해리슨 역에서 장모님의 딱 한마디, '그만하고 돈이나 벌자'는 그 말 한마디 때문에 내가 학교로 완전히 돌아갔던 거였다.
그런 얘기를 …… 공부해서 뭐 하나 돈을 벌어야지? 그렇다! 돈을 버는 것도 꿈이고 공부하는 것도 꿈인데 나는 아직도 20, 30대 젊은 나이였다. 그런데 돈만 왕창 벌어서 뭘 할 거지?라는 생각조차 명확하지 않았었다. 그 말을 들었던 그날 집에 들어와서 방구석에 자리를 틀고 앉아서 고민을 많이 했다. 길거리 상인을 하자하시는 장모님께선 날 낳아 키워 준 부모도 아니지 않은가? 나의 어머니였다면 이런 얘기를 했을까?라는 의문이 있었다. 날 오려내듯이 여기 미국까지 오게 한 이후엔 이리 말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그날 밤새도록 했다. 같은 식구라고 해서 속살을 보여주웠더니 소금물을 확~ 하고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내 친 어머님이었으면 어땠을까? 나를 키웠던 어머니, 나를 사랑했던 어머니가 지금 한국을 떠나서 미국에서 와있는 나 한데 지금 맨해튼에 나와서 매일은 못 했어도 시간을 내서 길거리 좌판 장사를 도와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나한테
“야, 다 때려치우고, 학교 입학할 돈 털어서 길거리에서 장사나 해서 돈이나 왕창 벌자"라고 했을까?
나의 어머니는 분명히 나의 공부하는 모습을 원했을 것이고 내 앞길만 생각했을 것이고, 분명히 친 어머닌 길거리에서 장사를 본인이 했을지언정 나를 이 길거리로 몰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친 어머닌 무학이셨다. 반면에 장모님은 한국에서 제일의 여자대학을 다니셨고 일정시대땐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금융계의 최고 집안이었다고 했다. 같은 부모의 서열이었더래도 나를 아끼는 사랑 앞에선 학력과 집안의 서열이란 민낯이 부끄러울 뿐이었다.
그래서 그날밤 그 집에서 가방을 다 챙겨가지고 그냥 바로 학교로 들어갔고 맨해튼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공부가 지금 3년이 지났는데 오늘이 나의 생애를 결정짓는 마지막 퀄리시험이었다. 이번이 두 번째 마지막 기회인데 두 번째 떨어지면 나는 학교를 더 이상 다닐 수도 없고 바로 퇴출돼야 했다. 그 정도로 시험 결과는 무서웠다. 학기 내로 기숙사도 떠나야 했고 그리고 내가 실험 조교로 있기 때문에 이 실험 조교의 생계비도 이제 3개월 후엔 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시험에 목숨을 거는 이유이기도 했다. 내가 정말로 조물주한테 간청이라도 해서 붙어야 할 일이고, 더 말 못 할 이유는 이 것은 미국에 와서 장모님의 말씀에 거역해서 시작했던 모든 행동의 결말인데 이게 떨어지면 사람이 별 별일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더욱이 미국 생활이 안되기 때문에 이었다. 실패라는 건 생각지도 말아야 하는 일이었다.
이 시험은 오픈북이고 그다음에 이미 기출문제도 있었다. 실패할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 할 순 없지만 아주 희박했었다. 나는 맥스웰 몰츠의 상상으로 만든 예상 문제도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감옥 같이 피 바르는 시험이 3박 4일을 하루 종일 치웠다. 첫날 9시부터 시작해서 이 시험을 시작을 하는데 만만치 않은 시험이다. 시험 문제 딱 피자마자 이거는 무엇인가 홀린 듯이 완전히 내가 아는 문제처럼 보였다 그래서 정신을 썼는데 그때 무감독제였다. 강단 안에 나와 또 한 친구가 봤는데 그 친구는 젊고 머리도 좋았고, 내가 볼 때 셈에 아주 빨랐고 준수한 친구였다. 그래서 그 친구는 물론 나보다 날 거라고 생각을 했었지만 내가 저 친구를 따라잡아서 무슨 1등을 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퀄리는 80점 이상이라고 얘기를 들었으니까 나는 그것만 맞으면 되는 거였다. 퀼리엔 나랑 경쟁할 상대일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계속 속 편하게 써내려 갔다. 이 시험 문제 답안을 충실하게 써 내려가고 또 시간도 보면서 무감독이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컨펌도 할 수 있었어 그러니까 거의 그 친구가 뭘 쓰고 있는지 내 친구가 뭐 있는지 다 보고 있었는데 내가 오답을 한 게 거의 없었다. 같은 기출문제 오픈북에서 서로 달라질 수가 극히 어려운 시험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내가 떨어지고 그 친구만 붙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여기에 들어온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프로젝트에 한 친구가 박사 코스를 받을 수 있는 프로젝트의 예산이 있었다. 이공계는 산업체와 협력하고 있어서 자금조성을 따오는 프로젝트와 연관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내가 순진했었다.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 내가 둘 중에 하나를 뽑은 건데 80점 이상이 되면 붙여준다고 얘기했기 때문에 나는 성적 점수만 고집했던 것이 이렇게 막판에 실패를 끌고 왔던 것이었다. 나는 또 나락에 빠져 들고 있었다. 결국엔 잘 못된 정보가 또 날 아프게 했다.
어쨌든 간에 이런 어려운 일을 당하고 나서 나의 내장은 거의 뒤틀려 바깥으로 나오는 그런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이 힘든 스트레스를 어떻게 견뎌가는가? 보다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날 것인가? 가 더 중요했다. 일단 이 배에 뜨뜻한 팩을 대고 그다음에 어디에 앉아 가지고 몸을 뜨뜻하게 해야 했다. 기숙사에 뭐~ 제대로 돼 있는 것도 없는데 조그마한 플라스틱에 앉아 가지고 물을 계속 교체되면서 찜질을 해댔다. 그래야지 속이 좀 편해지는 거였다. 학생이라 싼 학생건강보험만 있었다. 그때 무슨 약을 의사한테 처방받아 봐야 그 스트레스인데 그 스트레스가 지금 싸구려 학생 보험이 가지고 입원은 가당치도 않았다. 그러니까 집에서 이걸 고치고 있는 내 몸이 엉망진창이 되고 있는 것이다. 지치고 너무 지쳐 있었다. 이 정도로 탈진된 상태는 처음 경험하고 있어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다행히 며칠 지나니까 조금 회복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먹고 살 게 없었다. 생계 문제가 생긴 거였다. 그래서 나는 동전 줍기로 했다. UPS 가 그때는 장학금을 줬다 그런데 장학금을 주는데 신청을 했더니 생활비까지 나오는 대신 유학생들이 갈 수 있는 자리는 밤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였다. 거의 밤 꼬막 8시간을 일해야 했었는데 휴식시간은 중간에 딱 한번 10분간 주는데 그 시간 빼곤 쉬지 않고 햄스터처럼 일해야 했었다. 일반적으로 미국직장은 어딜 가도 건성 건성하는 데가 없었다. 일하러 나갈 때는 꼭 소금을 가져갔다 왜냐하면 컨베이어가 일정 속도로 돌고 있는데 UPS분류창고엔 물량은 계속해서 들어오고, 컨베이어 위에 40kg 이상의 물동량만 움직이는 컨베이어가 내 담당이었다. 여기서 이 40kg를 저쪽 컨베이어를 옮기고 또 그걸 분류하는 일인데 이일을 하다가 보면 땀이 억수로 났다. 몸이 완전히 회복 전이여 선지? 아님 옛날 몸이 아니어서 인지? 땀을 밤새도록 흘렸다. 그럼에도 새벽이 지나도록 일을 하는데 컨베이어는 계속 돌고, 이건 완전히 내가 사람이 아니었다. 군대에선 행군하다 죽을 정도의 훈련도 내가 버티셨는데 이 일도 행군만큼이나 만만치가 않았다. 땀이 너무 흘려서 염분이 빠지면 일하는 도중에 쓰러지니까 틈틈이 굵은소금을 입에 털어 넣어가면서 일을 하고 있는데 하루는 새벽 3시 정도가 되어서 팔에 힘이 빠져서 40kg가 왔는데 들지 못했다. 다시 한번 시도했다. 여전히 같은 팔은 분명 몇 시간 동안 이 정도는 들어 올렸는데 이팔이 안 움직였다. 다시 또, 이번엔 몸만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으차”
“으응씨~”
팔은 마비된 것 같았고 입에선 거의 욕 비슷한 소릴 내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있는 컨베이어 상단 위에 양쪽 발을 지대고 서서 있던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가 이곳 반장이고 작업자들에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지시하는 흑인 여자였다. 나이는 20대 중반에 키는 165 정도 몸무게 50킬로로 뚱뚱하지 않고 차라리 살이 없어 보였는데 그 반장 여자가 켄베이어 위에서 점프해서 내려오더니 내가 보는 앞에서 그녀의 괴력을 발산했다. 나는 비실거리고 있었는데 이 흑인 여자가 하늘 위로 날아와서 버거워하던 그 상자를 번쩍 들어 저쪽을 옮겨 놓고 다른 컨베이어로 원숭이가 나무를 타듯이 훌쩍 가 버렸다. 내가 일하던 UPS에선 남자와 여자에 대한 구분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던 한국 정서엔 아직 여자와 남자의 뚜렷한 구분이 있었다. 그때 여자가 와서 나를 도와주면서 40kg를 번쩍 드는 흑인 여잘 볼 때 아~ 정말 대단하게 보였다. 그때 나는 미국의 남녀에 대한 개념정리를 다시 하고 있었다. 이것이 그날 처음 경험했던 미국의 남녀 노동 문화였다. 그러니까 한국처럼 여자라서 그냥 공주 대접을 받는 게 아니라 미국은 여자라도 그냥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버리는 자본주의의 극치를 나는 목도하고 있었다. 능력주의였다. 여자든 남자는 능력 있는 것이 존대받은 자본주의 사회였다. 나도 그때부터 그 걸보고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런 동전 줍기까지 하면서 이 일을 하고 있을 때 나에겐 생각이 있었다. 이런 경우에 나의 퀄리가 실패가 되었으니 어떻게 되냐? 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지? 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결국 난 학위도 없이 학교에서 쫓겨 나오게 된 것이고, 그럼 난 이 실패를 어떻게 받아 들려져야 하는가? 였다. 그렇지! 이 실패를 어떻게 내가 이해하고 있어야 하며, 어찌 다시 셑팅해서 다음 행보를 하는가? 가 나에겐 중요했다. 실패는 그냥 실패였다. 실패가 무서운 게 아니고 어떻게 해석되는가? 가 나에게 더 중요했다. 그 당시에 나는 실패를 실패로 보지 않고 있었다. 실패를 한 실험이나 게임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이것 때문에 죽어야겠다는 감정은 들지 않았다. 어느 정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는 이미 준비가 된 상태였으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UPS에서 죽을 정도로 육체를 혹사하다 보니 살아야겠단 생각으로 더 꽉 차 있었다. UPS에서 커다란 배움을 얻었다. 정신이 비딱해졌으면 육신을 단련해서 정신을 정상 궤도를 되잡는 걸 배웠고, 육신이 비정상이면 정신을 돼 잡아서 육신이 다시 정상 궤도를 잡는다는 걸 배웠다.
해서 시간이 지나선 잘 될 거라는 막연한 모습으로도 앞길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장은 막막한 상태이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왕자 모습을 상상할 순 없었다. 단 상황이 주는 아픔이나 자존심에 상흔이 생기는 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그러니 그 상황은 책이든 남의 경험이든 내가 필요한 것을 찾아내야 했고 그때 읽었던 책은 중요했다.
그 당시엔 내가 읽고 있던 몰츠박사의 싸이버그넼티스가 도움이 되었다. 나는 잘 될 거라는 상상을 계속했다. “나는 잘 돼”란 말까지 하면서 계속 날 세뇌했다. 나는 이것도 없었으면 이 고립된 상황에서 빠져나올 마지막 기회조차 없을 거란 생각 때문에 더 열심히 그리고 주기적으로 상상했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나누워서 주기적으로 했다. 사회생활이 어려울 땐 특히나 가정에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옛날 좋았던 감정으로 대체하면서 “몰츠의 버티기”로 견디어 내고 있었다. 그러자 나는 어디서 오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잘 되게 되어 있는데 지금 당분간 힘들 것뿐이다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마 믿을 것도 없는 막연한 이것 때문에 이 위태로운 상태에서 굳건하게 나를 버티게 해 줬던 것 같다. 내가 회복영역 안에 있어서였는지 이게 가능했다.
그 와중에 나름대로 얻은 게 뭐냐 하면 여기서 목숨 거는 정도의 실패는 실패에 상흔이 남는다는 것도 알았다. 물론 어떤 경험이든지 귀하고 천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뭘 하더라도 실패도 계획 안에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떨어지면 어디로 갈지 한 번쯤은 추론해 보는 것만으로도 미래가 덜 두려웠다. 아까처럼 UPS에 가서 고생하면서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일 즉, 여자가 내 물건을 들어준 고마움이 일종의 모멸감으로 느낀다면 내가 처한 상황이 심각했단 해석이다. 흑인여자가 나에게 상처를 준 적이 없다. 박스를 들어주고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날 한번 힐끔 쳐다보곤 그냥 가버렸다. 단 그 당시 상처를 받았다 한다면 그건 순전히 내가 약해 있어서 생긴 것이고 내가 만든 상처일 뿐이었다. 이렇게 약해서 생긴 상처는 내 DNA에 상흔을 남긴다. 그런데 난 그 정도는 아직 아니었다. 그러니까 실패는 계획안에 다시 말해서 회복 가능한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시도는 가벼운 마음으로 게임하듯이, 잽을 날리듯이 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나비처럼 날라서 벌처럼 쏘았을 때만 상대를 못 맞힌다 하더라도 그래도 두 번째 기회는 생긴다. 그때 상흔이 남기지 않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나의 타력성이었다.
나를 어려운 상황에서는 행복한 상상을 하거나 말로 나를 위로했던 것으로 감정대체를 시켜었는데 그렇게 자꾸 힘들어도 연습하니까 힘이 생기고 다음 일을 할 수 있었다. 이게 나의 두 번째 찬스를 만드는 기회를 제공했다. 어려운 상황에 시간이 가고 있었고 이력서를 마구 제출할 수 있었다. 그때엔 이력서를 쓰는 것도 잘 몰랐는데 시립도서관에 가서 미국 이력서를 쓰는 걸 공부해서 보냈다. 그때 내가 최악으로 힘들어할 그때 지금까지도 애가 없던 아내가 임신까지 했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까지 생겼다. 힘들긴 하지만 책임감은 절대 나쁜 게 아니다.
가족이 생겼는데 내 문제만 끼고 끙끙거릴 때가 아니었다. 난 이 정도면 내 두뇌는 완전 전투모드로 변신해야 했었다. 이거 먹고살아야 되는데 가족에 대한 책임까지 생겼으니 보통마음가짐으로 살 수가 없었다. 나는 책임감이 굉장히 컸다. 새로운 아이가 생기는 가족문제는 내가 해결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장이 뭔지? 전혀 몰랐지만 이건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만은 꽉 차있었다. 나의 두뇌구조가 바뀌도 내 두뇌는 새로운 호르몬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그렇게 커다란 퀼리가 약지 손톱만 하게 변해 있었다. 그래서 나의 밑바닥을 뒤져 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뒤져 보는 방법이 바로 양자물리학의 그 오비털, 궤도를 생각해 냈다. 그리고 나는 이미 머리엔 투구를 쓴 글래디에이터였고 오른손으로 잡은 것은 커다란 대검이었고 왼손으론 날아오는 웬만한 화살이나 창은 맨손으로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곧 뉴욕레스토랑의 웨이터를 지원했고 후회는 없었다. "이 장에 나오는 아이디어는 [Maxwell Maltz]의 [Psycho Cybernetics]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맥스웰 몰츠의 상상팁 2; 몰츠의 버티기
뇌의 시냅스(synaps)는 느낌의 핵심 저장소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다. 현재 좋지 않은 감정은 다른 시간 때 저장된 스냅스로 대체될 수 있다. 즉 뇌의 시냅스는 다른 뇌의 시냅스에 의해서 교체가 가능하므로 괴로운 감정은 과거의 행복했던 감정으로 대치한다. 예로 군대 얼차려 중에 군입대 전 파티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얼차려의 상당한 고통을 완충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이 상상만으로 발생한 정신적 고난을 대치시킴으로써 이겨내는 몰츠의 버티기이다. "이 아이디어는 [Maxwell Maltz]의 [Psycho Cybernetics]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