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꼴라쥬 Jun 01. 2020

잃어버린 조각들에 대하여..

ft. 이터널 선샤인

얼마 전 찌뿌 두둥 골골대는 몸을 핑계로 침대에 누워 넷플릭스 창을 열었다. 마땅히 보고픈 영화도 볼만한 프로그램도 없어 고민하던 찰나, 영화 이터널 선샤인이 다시금 눈에 들어왔다. 이미 십여 년 전부터 수차례나 반복해서 보았던 영화인데, 최근 몇 년간은 제대로 본 기억이 없는듯하다. 그래서 재생했다.


짐 캐리가 잠에서 깨어나 찌그러진 자동차를 의아하게 쳐다보는 장면과 지하철역에서 불현듯 다급하게 몬탁행 열차로 갈아타는 장면은 다시 보아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꽉 막힌 바른생활맨 같은 그(조엘, 짐 캐리)가 갑작스레 일탈을 강행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는 점차적으로 진행되는 스토리상으로 바로 확인이 가능했다. 조엘은 몬탁으로 가는 열차에서 클레멘타인을 만나게 되고, 신기하게도 자꾸만 그녀에게 눈길이 간다.


클레멘타인.. 나의 어린 시절에도 즐겨 부르던 노래였는데.. 이 영화에서 또다시 만나게 되니 상당히 반가우면서도 상당한 이질감이 든다.


깊고 깊은 산골짝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금을 캐는 아버지와 예쁜 딸이 살았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어릴 적엔 아무 생각 없이 마냥 신나게만 불러대던 동요였는데.. 이제 와 찬찬히 들여다보니 가사가 상당히 비극적이다. 금을 캐러 가기 위해  자주 집을 비우는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던 어린 클레멘타인. 그녀는 불의의 사고로 생을 달리하고, 죽은 딸을 그리는 상실감에 빠진 아버지의 가슴 아픈 노래였다. 클레멘타인은. 이 노래를 개사해서 친구들을 참 많이 놀리기도 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문득 친구 녀석 하나의 얼굴이 스쳐가는군. '***아 ***아 ***는 똥 바보~ 너는 대체 언제부터 똥 바보로 살았니~' (잘 살고 있나.***?)


그 시절엔 왜 그랬을까. 이리도 심오하고 슬픈 노래를 가지고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클레멘타인 못지않게 슬픈 동요가 또 하나 있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어 다 못 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바로 섬집아기. 이 또한 슬픈 전설이 존재하는데.. 외딴섬에 살고 있던 엄마와 어린 아기. 생계를 위해 굴을 따러 나갔던 엄마는 폭풍우에 휩쓸리고 우여곡절 끝에 살아서 돌아왔지만, 그 사이 엄마를 기다리던 어린 아기는 굶어 죽었다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잠이 들었다는 것은 아이의 죽음을 의미하고.. 엄마가 모랫길을 달려오는 건 아이의 부고를 들었기 때문이라는 카더라 통신. 이 스토리가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섬집아기를 들을 때마다 부를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울컥하며 뜨겁게 솟구쳐 오르는 건 사실이다.


아이들이 즐겨 부르는 동요에 아이들이 없다. 아주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이들을 그리워하는 부모의 상실감만이 존재한다. 어째서 아이들의 노래 가사들이 이렇게 되었을까. 어쩌면 노래를 만든 이가 모두 어른이기에. 그러고 보면 예나 지금이나 우리네 어른들은 좀처럼 역지사지(易地思之)가 되지 않는 존재들이다. 적어도 어린아이들의 동요에는 밝고 희망 넘치는 메시지들만 존재하면 안 되는 걸까. 결국은 아이들의 심리를 고려하지 않은 아이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아이들을 위한 노래들이다. 덴장.


그러고 보니 불혹을 지난 요즘에 와서 자주 드는 생각이 있다. 어릴 적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던 많은 것들이, 또 다른 시각에서의 판단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너무 많이 보인다는 것이다. 영화를 볼 때도, 드라마를 볼 때에도 기획자가 보여주고자 했던 숨겨진 메시지나 상징 그리고 메타포들에 나의 경험들을 투영해가며 쓸데없이 자꾸만 눈으로 머리로 파고들게 된다. 그러다 보면 다소 느린 속도의 가슴은 미처 그 속도를 따라오지 못할 때도 있다.


이는 현실에서도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러다 보니 쉴 새 없이 머리는 굴러가고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결국 하루하루의 시간들을 집어삼킨다. 그런 지경에 이르다 보면 정작 중요한 기본을 놓쳐버리고 주객이 전도되는 경우들도 생겨나 스스로를 멋쩍게 만들어 버리기도 하고.. 쉴 새 없이 조잘대는 머릿속의 생각들로 애처롭게 외쳐대는 마음의 소리를 놓치게 되는 상황들이 생겨난다.



이터널 선샤인에서는 사랑하는 연인이 그 흔한 성격차이를 버티지 못한 채 애정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이별을 하게 되고, 상대의 기억을 지워버리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두 사람은 또다시 만나 사랑을 시작하게 되는데..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의 이름이었던 라쿠나가 잃어버린 조각들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라는 점에서 유추해보자면, '이터널 선샤인' (순결한 마음의 영원한 햇살)은 가슴속의 온전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고, 잃어버린 조각들이라 함은 머릿속에서 사라져 간 일부의 기억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결국 머릿속의 기억은 사라져도 가슴속의 기억은 그대로 살아남아 다시금 머릿속의 기억을 만들어낸다 정도랄까..


그렇다면, 라쿠나사에서 근무했던 매리가 지웠던 기억들을 다시 주인들에게 돌려준 행위가 주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이 또한 '인위적으로 기억을 지운다 해도 감정이 사라질 수는 없다'는 것을 친히 그들에게 알려주고자 했던 것일까. 훔. 그게 과연 기억까지 지워가며 잊고자 했던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행위였으려나... 사실 잘 모르겠다.


다시 보아도 이터널 선샤인은 어려운 영화다. 역시나.


그럼에도 자꾸만 이 영화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예전엔 애틋한 사랑과 예쁜 영상에 취해서일 테고, 지금은 내 머릿속의 쓸데없는 기억들을 조각조각 내어 지워버리고픈 욕구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 처음 볼 때만큼의 감동은 아니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의 감동과 고민을 안겨주는 이터널 선샤인은 역시나 추천할만한 영화라는 점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여전히.

이전 12화 소마 1그램만 부탁합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