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품사는 시시각각 변하는 동사다!
류시화 시인의 에세이집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에 나오는 문장이다. 에세이 속의 글로 미루어 짐작건대, 누구보다 동적으로 사고하고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반응하는 듯한 시인의 품사는 정녕 동사가 맞는 듯하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품사는 어떠한가. 애매하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딱, 이거다.' 싶은 품사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고유명사?!' 혹은 "대명사?!" 라고 하자니, 뭔가 특색이 없어 살짝 자존심이 상하는 듯도 싶고. 그렇다고 시인의 말처럼 거창한 동사를 내 이름 앞에 넣어보려니 심히 정적인 나의 일상이 눈에 밟힌다.
이런 나에게도 동적인 취향이 있다. 바로 독서다. 사실 생각의 기준 또한 동적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이건 잠시 미뤄두고..
나이에 따라 시기에 따라 끌리는 책의 종류가 변화한다. 이건 나만의 경우인 것인지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자주 변한다. 아주 어린 꼬꼬마 시절에는 세계명작동화에 꽂혀 살던 나였고, 고학년이 되었을 때에는 문고판 책에 살짝 꽂혀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주로 만화책에 꽂혀있었고. 만화책에 심취하는 것과 비슷한 양상으로 현대문학 소설을 좋아했다. 이후 대학생이 되고부터는 음주에 빠져 책을 살짝 멀리하는 시기가 도래했고, 졸업 후에는 일부 작가들에 국한된 소설 읽기에 심취해있었다. 그러다 회사원의 생활이 익숙해진 무렵부터는 지겹도록 자기 계발서를 읽기 시작했고, 미니미들이 생긴 시점부터는 주로 육아 서적과 동화책을 통해 활자를 머릿속에 채웠다. 그랬던 내가 요즘 꽂혀있는 책들은 에세이다.
젊은 시절, 내가 제일 싫어하던 책에는 딱 세 분류가 있었다. 1.자서전 2.자기계발서 3.에세이 가 바로 그것이다. 1.3 번은 저자가 '나 잘났소' 하며 쓰는 듯한 글들이 대부분이라 뭔가 거부감이 들어 보기가 싫었고, 2 번은 인정하고 싶지가 않아 그저 싫었다. 자기 계발서에 나오는 내용들은 다들 수박 겉 핥기 혹은 하나 마나 한 교과서적 지식들인 경우가 태반이었고, 이따금 실전적인 내용이 실려있다 하더라도 그건 저자의 환경에서나 통할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했기에 나와는 너무도 먼 이야기들 같아서 싫었다. 그랬던 내가 요즘 가장 즐겨 읽게 되는 책들 중의 하나가 자기 계발서요, 또 하나가 에세이라니.. 참으로 격하게 동하였다 볼 수 있지 아니한가. 심지어 최근 류시화 시인의 에세이나 다시 읽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는 책장이 넘어가는 것이 아까워서 조금씩 초콜릿을 녹여먹듯 아껴읽고 있음을 그 시절의 내가 안다면 , 얼마나 진한 다크향을 풍기며 썩소를 날려주려나.
독서 취향이 이렇게나 변화하는 동안, 나의 품사에는 어떠한 변화가 있었으려나.. '정적 - 동적 - 정적 - 동적 -동적 - 정적.. ' 아마도 이러한 패턴으로 삶이 변해온 듯 싶기는 한데, 그렇다 한들 '지금의 나의 품사가 최종적으로 동사에서 단순 명사로 변하였습니다.'라고 하기에는 여전히 뭔가 걸쩍지근함이 남는다.
이쯤에서 글을 마무리하려면 무언가 타협을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문득 푸르른 새싹의 싱그러움을 뿜어내던 학창 시절로부터 다소 차갑지만 맑고 깨끗했던 젊은 시절의 파랑, 결혼을 목전에 두고 뿜어내던 핑크빛의 기운이 떠오른다. 이후 미니미를 낳고 조금은 아리송한 퍼플빛의 기운이 맴돌았다가 지금은 여러가지 다양한 색이 모두 합쳐져 점점 어두운 검은색의 기운으로 넘어가는 중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말이다. 옳거니, 바로 이거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지금 나의 삶은 형용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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