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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o Dec 03. 2024

게임으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고찰하다

게이미피케이션 콘텐츠 소개 #8

게임학습콘텐츠로 철학적인 담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게임학습콘텐츠는 보통 어떤 정보, 프로세스를 암기하거나 덕목(핵심가치, 규범 등)을 인지하는 과정을 지원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희 비따비는 인지적 학습을 넘어, 플레이어들이 윤리의식을 깊이 성찰하고 철학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게임을 세상에 내어보고 싶어왔습니다.


FINAL SOLUTION은 그러한 도전으로 시작한 프로젝트입니다. 지금부터 게임의 특징을 소개하며 어떻게 게임으로 교육현장에서 철학적 담론을 이끌어냈는지 소개드리겠습니다.

비따비의 여섯 번째 고전 기반 게임학습콘텐츠 시리즈, FINAL SOLUTION


유럽연합 난민 이송의 총책임자로 부임하다


FINAL SOLUTION에 참가한 플레이어는 유럽연합의 난민이송 책임자로 매 라운드 제공되는 예산을 가지고 최적의 이송 루트를 계획하고 실행합니다. 게임은 보드 위에서 진행되며, 모바일 디바이스 상에서 내린 결정이 게임 보드판 위에 반영됩니다. 가장 많은 난민을 이송하면, 게임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난민을 이송하기 위해 지도를 바라보는 모습



만만찮은 미션, 팀을 이뤄 문제를 해결하다


FINAL SOLUTION은 최소 6인에서 최대 30인까지 참여할 수 있는 대규모 게임입니다. 여섯 개의 팀으로 나뉘어 각 팀은 4~5명의 플레이어가 협력하여 가장 많은 난민을 이송하기 위해 열차의 스펙을 설정하고, 라운드 별 행선지를 설정합니다.

모바일 디바이스에서 나의 열차의 스페과 행선지를 설정하는 인터페이스. 여기서 결정되는 사항은 게임 보드판에 구현된다.




디지털의 편리함과 아날로그의 감성을 결합하다


이 게임은 디지털 디바이스의 편리성과 직관성, 그리고 아날로그의 감성을 모두 잡기 위해 Web App과 피지컬 컴포넌트를 결합했습니다. 플레이어는 앱을 통해 각 의사결정에 필요한 소요 자원을 빠르게 산정하여 최적의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을 지원받고, 의사결정의 결과가 보드판 위에 반영됩니다.

피지컬 컴포넌트와 모바일 App이 조화롭게 동작한다.



숨겨진 반전이 주는 윤리적 교훈


FINAL SOLUTION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반전에 있습니다. 약 두시간에 걸친 게임이 끝나고, 가장 우수한 난민이송 책임자를 가린 후, 진행자는 참가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난민을 이송하고 재정착시키는 목적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나요?

쉘터로 정착한 난민은 어떻게 될지 궁금하진 않으셨나요?


대부분은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게임에 푹 빠져 하는데 바빴기 때문이죠. 그럼 그 뒤로, 이렇게 질문을 이어갑니다.


게임 내의 언어를 이렇게 바꾸면 어땠을까요?

난민 → 유대인

이송/재정착 → 추방

쉘터 → 절멸 수용소

최종해결책(Final Solution) → 인종 말살 정책


갑자기 우리가 푹 빠져 즐겼던 게임이 유럽 각지에 퍼져있는 유대인을 효율적으로 말살시키는 피카레스크로 변모합니다. 특히 우수한 성적을 달성해 우쭐해하던 플레이어들은 아연실색하기도 합니다. 이 순간 FINAL SOLUTION은 철학적 담론의 장으로 전환됩니다.



게임을 통해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논하다


한나 아렌트는 1960년대,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는  아돌프 아이히만의 법정 발언을 취재하며 나치의 구성원들이 사악한 악마가 아니라, 깊은 사유 없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 '평범한 사람들'이었음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게임 내에서 플레이어들이 시스템에 따라 행동하며 의사결정을 내리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점검하지 않았던 점을 돌아보게 합니다. 물론, 플레이어가 단 두시간 만에 나치와 같은 악행을 저질렀다고 할 순 없지만, 악의 온상을 잠시 간접 경험함으로 섬짓한 기분을 느낍니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취재하며 겪는 내적 갈등을 심도 있게 다룬 영화 '한나 아렌트'


참가자들은 짧은 게임의 과정에서 언어 규칙과 시스템에 따라 행동하며, 자신이 사유하지 않을 때 어떤 결과가 발생할 수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경험합니다. 이는 시스템에 의해 사유가 무능해지는 과정을 돌아보며, '나는 나의 삶에서 얼마나 사유하고 사는지'에 대해 점검합니다.



게임학습콘텐츠의 새로운 방향성을 시도하다


일반적인 게임학습콘텐츠는 학습목표 또는 학습 콘텐츠에서의 덕목과 게임의 목표를 일치시키는 방향으로 개발합니다. 예를 들어, 보통의 게임은 특정 지식이나 스킬을 습득하는 데 초점을 맞추며, 학습자가 미리 설정된 규칙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FINAL SOLUTION은 게임의 목표와 학습 목표를 의도적으로 충돌시켜 플레이어들이 스스로 상황을 재평가하고 윤리적 고민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이러한 차별점은 학습자에게 기존의 게임 경험에서 벗어나 깊이 있는 성찰을 이끌어냅니다. 한편, FINAL SOLUTION은 오히려 게임의 목표와 학습 목표를 반전시키며 학습자들의 공감을 세련된 방식으로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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