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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주얼페이지 Mar 04. 2022

살인자와 힘겨루기 한판

<이방인> 읽기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번뇌를 하는 자와 아닌 자의 힘겨루기다.

 

수시로 짜증내고 후회하고 걱정하며 사는 나로선 뫼르소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지금도 뫼르소의 마음까지 들어가서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하고 겉을 빙빙 돌면서 생각해볼 뿐이다. 공감은 나와 다른 사람이 있다고 그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내 가족의 일원이라고 상상하면서 관심을 갖되 판단은 멈추고 왜 그랬을까 궁금증을 가져본다.


그러면서 뫼르소에게는 없는 3가지를 찾았다. 하나는 번뇌가 없다. 둘째는 못난 감정이 없다. 그 결과로 셋째, 스토리텔링이 없다.



번뇌

뫼르소는 번뇌를 하지 않는다. 모든 게 순간일 뿐, 감정을 담아 괴로워하지 않는다. 과거나 미래를 엮어 걱정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장례식, 레몽과의 사교, 마리와의 교제, 개 키우는 영감과의 대화 등에서 손해와 이익 같은 것을 판단하지 않고, 자신이 가는 곳 혹은 있는 곳에서 만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야기를 들을 뿐 자기 의견을 내놓지 않는다. 사건 이후 예심판사에게도 변명을 하지 않는다.


<사피엔스>에서 저자는 고타마 싯다르타가 찾은 ‘번뇌의 원인은 불운이나 사회적 불공정, 신의 변덕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번뇌는 사람의 마음이 행동하는 패턴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라고 말한다.


“고타마는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만일 즐거운 일이나 불쾌한 일을 경험했을 때 마음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거기에는 고통이 없다. 당신이 슬픔을 경험하되 그것이 사라지기를 원하는 집착을 품지 않는다면, 당신은 계속 슬픔을 느끼겠지만 그로부터 고통을 당하지는 않는다.”


감옥에서 후회나 잘못을 뉘우치는 태도가 전혀 없는 뫼르소를 보고 예심판사나 신부는 신을 찾으며 분노하지만, 뫼르소는 평정을 유지한다. 번뇌 없는 뫼르소는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고 재판을 받는 뫼르소에게 살생을 금지한 부처의 가르침을 적용하자니 영, 이상하지만, 어쨌든 그에게 공감하는 게 목표이니깐 번뇌 없음을 그에게 변명으로 내어 본다.


못난 감정

그에겐 못난 감정이 없다. ‘못난 감정’이란 캐시 박 홍이 <마이너 필링스>라는 책에서 소개한 개념인데, 긱 경제(공유경제) 체제에서 사람들이 부러움, 짜증,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단어라고 설명한다. 이 ‘못난 감정’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뫼르소가 생각났다. 뫼르소에게서는 못난 감정을 읽어낼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뫼르소에게 분노하는 것이 아닐까.


못난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뫼르소를 못난 감정을 가지고 본다. 그 밑바탕에는 시기심이 있지 않을까. 나도 그래서 그가 불편하다. 살인을 한 동기에 부러움이나 짜증, 지루함 같은 감정이 있었다고 하면 그것에 대해 화를 내거나 책임을 추궁할 수 있을 텐데, 어떤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왜 그랬니 왜 그랬니 물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너무 답답하고 짜증 난다. 결국 검사는 살인 사건과 관계없는 어머니의 장례식까지 이 사건을 끌고  갔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아니었다면, 그에게 어떤 책임을 물을 수 있었을까.


스토리텔링

뫼르소는 스토리텔링을 할 이유가 없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짓는 이유는 힘을 합치기 위해서 혹은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일 텐데, 뫼르소는 순간뿐이므로 변명할 이유가 없기에 이야기를 만들 필요가 없다. 이야기를 만들어서 머리 조아리지 않는 그에게 어떻게 분노할 수 있을까.




공감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생각 끝에 3 무를 찾아보았지만, 끝내 나는 그가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면 우연의 연속에서 이런 사건이 생기고 내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게 무섭다. 20년을 더 산들 의미 없다고 하는 말에서 뫼르소는 다른 사람의 20년도 애석하게 여기지 않을 테니 반성이나 책임을 물어봤자 의미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내가 피해자가 된다면 너무나도 억울할 것 같다. 지독하게 허무한 뫼르소. ‘번뇌와 못난 감정, 스토리텔링 없음’의 3 무는 그에게 변명거리를 줄 수 있는가? 뫼르소는 내가 이렇게 찾아낸 3 무에 어떤 생각을 할까?


공감이나 그를 동정할 수 있는 것을 반드시 꼭 찾아야만 한다면, 뫼르소처럼 고통에 대한 연민과 감정인 번뇌가 없이, 심플하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호불호 없이, 선악 판단 없이 무디게 사는 인생이 좋을 수 있을까? 감정의 굴곡이나 굴레 없이 사는 게 좋은 것일지 계속 생각하게 된다. 번뇌하는 중생으로서 뫼르소와의 줄다리기에서 지는 게 어쩐지 불편하고 불안해서 끙끙 줄을 쥐고 있다. 놓아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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