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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주얼페이지 Jul 07. 2020

여행의 의미


코로나 19 사태로 집에만 있는 동안 코로나 백신과 약이 나오면 어디에 가고 싶은지 수시로 생각했다. 꿈이야 내 마음대로 꿀 수 있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관련 신약 출시는 내 마음대로 안된다. 기다려도 희망적인 소식이 없어서 꿈만 꾸다가 포기했다. 그 대신 예전에 갔던 여행지들을 떠올려봤다. 못해본 걸 상상하는 것보다 경험한 것을 생각하는 게 더 구체적이고 실감이 나면서 시간이 잘 흐르기 때문이다. 




좋았던 여행지와 별로였거나 나빴던 여행지를 기억에서 찾았다. 내 인생 최고의 여행은 발리로 갔던 신혼여행이고, 최악의 여행지는 결혼 후 8개월 만에 여름휴가로 떠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였다. 좋았던 곳은 포틀랜드, 캐논 비치, 여름휴가 때 몇 번 갔던 제주도, 작년 친정식구들과 함께 갔던 베트남의 다낭, 두 딸들과 모래놀이와 망중한을 즐긴 부산 해운대와 남해 은모래해수욕장이다. 그리고 여행 당시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무색무취로 기억되는 여행지는 미국에서 공부할 때 가봤던 캔쿤, 마이애미 키웨스트, 하와이, 그리고 동부와 서부의 몇몇 대도시이다.


또 한 번 꿈을 꾼다.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퍼지기 직전으로 갈 수 있다면 어떤 여행을 가고 싶은지 상상해본다. 3월부터 시작된 몇 달간의 사회적 격리기간을 생각하면 혼자 여행을 떠나 기운을 충전시켜 놓고 싶다. 하지만 꼬맹이 두 딸이 집에 갇혀 지낸 것을 생각해보면 사진과 동영상으로나마 시간을 보낼 수 있게 가족여행을 가는 것이 더 좋겠다. 어디로? 발리로 가고 싶다.


왜냐하면 그곳에 갔을 때 행복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신랑과 언젠가 다시 꼭 오자고 약속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함께 다시 오길 바라는 여행, 이 말은 신랑이 있어서 좋았다는 말이다. 그가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한 여행이었다.


한편 무색무취로 기억되는 여행지들에 한번 더 기회를 주고 싶은 생각은 없는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휴양지들인데? 그럴 생각 없다. 설렘이 없기 때문이다. 확실한 행복이 있는 곳에 가서 코로나 19 사태 기간을 버틸 힘을 얻어 오고 싶다.


아주 특별한 사실이 눈에 띈다. 무색무취의 여행지에는 남편이 없다. 무색무취의 여행지는 제 아무리 이름난 휴양지이거나 관광지이더라도 내겐 '한 번 가본 적 있는 곳' 일 뿐이다. 혼자 가거나 동행자가 있거나 상관없이 바쁘거나 지루했을 뿐, 공허함을 느꼈다.


그때의 여행을 되돌아보면 일상의 연속 같다. 여행은 일상에서의 생활 태도나 관계가 그대로 이어졌다. 돈을 쓴 만큼 넓고 얕게 모든 것을 알려고 했고, 관광에 대한 기대치가 매우 높았다. 여행을 통해 나라는 사람 혹은 동행자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거나, 관계가 진전된다거나 같은 변화가 없었다. 남는 게 없었다. 낯선 곳에서 일상 혹은 일탈을 꿈꾸며 여행을 떠나지만 결과적으로 변화의 생성이 있는 여행이 내겐 더 큰 의미를 갖나 보다.




그렇다면 신랑과의 여행에서는 어떤 변화가 생기길래 최고의 여행지 혹은 최악의 여행지가 나왔을까? 신랑을 만나기 전의 여행에서는 항상 이렇게 생각했다. "다음에 누군가와 꼭 같이 오고 싶다." 어떤 동행자를 꿈꾸는지 그땐 막연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시간과 건강, 돈, 마음을 함께 마음껏 나눌 수 있어서 감사한 사람, 그래서 행복함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을 바랐을 것이다. 신랑이 그런 사람이다. 좋든 나쁘든 신랑과 함께 한 여행은 행복함과 괴로움을 겪으면서 나란 사람을 더 잘 알게 해 주고, 나를 나로서 받아들이게끔 만들어줬다.

신랑과 여행을 갈 땐 각자의 욕구나 감정 상태에 따라 싸움과 양보가 있고 후회나 고마움 같은 감정들이 생긴다.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내면을 살펴보게 된다. 충돌과 합의를 통해 서로에 대한 지식을 쌓아가고, 콘텐츠가 생긴다. 단순히 '나도 가봤어.'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그는 어떤지 알게 됐어.'의 여행이 된다. 다음엔 어떻게 하면 같이 더 재밌는 여행을 할 수 있겠다는 희망과 기대가 생긴다. 


쿠알라룸푸르는 그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최악의 여행지가 되었지만, 그와 함께 한 덕분에 나의 부족함을 깨달을 수 있어서 감사한 여행지이기도 했다. 쿠알라룸푸르 여행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정하고서는 내 뜻에 맞춰주지 않는 그를 여행 내내 원망하고 다투다가 비행기를 놓치고서야 제정신을 차린 나를 품어준 그에게 감사한 여행이다.'라고....


미움도 관심이 있으니 싹트는 감정이란 걸 생각하면 그 여행지에 대한 미움도 무엇에 관한 기억이 남아 있기에 생긴다. 대상을 추억하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아름답고 즐거운 여행지라고 한들 추억이 없다는 건 존재가 없다는 말과도 같다.


무색무취의 여행지에서는 나라는 존재가 없었다. 여행 콘텐츠를 소비하는 존재가 있었을 뿐 감정을 생산하는 존재인 내가 없었다. 그래서 감사할 것도 없는 여행이었다. 내가 없는 곳에서 행복함을 느낄 수 없는 게 당연하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무색무취의 여행지에 남편과 함께 가면 어떨까? 갑자기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기대된다. 분명 우리가 각자 그리고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들을 더 많이 찾을 수 있는 여행이 될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맘껏 즐기고 있을 것 같다. 내 인생 최고의 여행지로 바뀔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최악의 여행지로 갱신될 수도. 




남편을 만나고 나서 함께 여행을 할 때마다 나란 사람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 그리고 신랑과 함께 하는 나의 존재가 있음을 감사하게 된다. 내 곁의 신랑의 존재에도 감사함을 느끼게 되고, 함께 하는 여행을 꿈꿀 수 있어 행복하다. 존재의 감사함을 누릴 수 있는 여행을 떠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이번 주말 어디로든 여행을 가야겠다. 보따리 싸들고 멀리 갈 순 없지만 어디든 우리가 함께 있으면 좋은 곳이 될 테니, 소풍 계획을 세워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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