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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주얼페이지 Jul 18. 2020

단순하게 노션을 쓴다

단순한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정보가 넘친다. 많은 분야에서 내가 알아야 할 것과 알고 싶은 것들이 책과 인터넷에 널려 있다. 그것들을 나의 시간과 관계 그리고 능력과 조합해서 한눈에 관리할 수 있는 수첩을 만들고 싶다. 갖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되고 싶은 것 등 수많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시간과 돈, 능력을 잘 관리해야 한다.


고등학생 때부터 다이어리에 관심이 많았다. 6공 다이어리 꾸미기에서 출발해서, 플랭클린 플래너, 3P바인더, 윈키아 플래너 정도까지 손대 봤고, 불렛 저널에 좋다는 노트라면 웬만한 건 다 써봤다. 나의 정리의 역사 중 중요한 것 하나를 말하자면 고등학생 때 이미 불렛 저널을 만들어 썼다는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하는 불렛 저널을 처음 봤을 땐, '아, 정리와 편집, 기획이 남다르면 돈이 되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왜 꾸준히 할 생각도 못했고, 다른 사람에게 소개해 볼 생각도 못했을까?


내 다이어리는 늘 가방 깊숙한 곳에 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안 보는 곳에서 다이어리를 썼다. 중요한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님에도 보여주기를 꺼려했다. 쓰는 건 참 좋아했는데 다이어리를 왜 쓰고 있는지에 대해선 잘 알지 못했다. 다이어리가 일기가 아니고, 정보를 관리하는 도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가 다이어리에 쓰는 것은 고작 가족 이벤트와 월간 및 일간 일정과 수많은 정보, 이게 전부다. 그중 '수많은 정보'가 문제인데 이것들을 모으고 기록한다는 사실을 누가 아는 게 부끄러웠다. 나만 알고 싶은 정보이기도 하지만 사소한 정보들이라서 어쩐지 부끄러웠다.


차곡차곡 쌓아두는 정보가 늘 다이어리의 정해진 지면보다 넘친다. 활자 집착이라고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텍스트에 집착한다. 잡지나 신문, 책을 보기만 하면 오만 것들이 다 알아야 할 것들이라서 남겨둬야 한다. 다시 안 볼 확률이 더 높은 걸 알면서도 혹시나 싶어서 수첩과 스크랩북에 오리고 붙이고 옮겨 적는다. 스크랩하려고 놔둔 날 것의 신문과 잡지 쪼가리들, 두꺼운 스크랩북 여러 권이 책장 곳곳에 비좁게 꽂혀 있다.


내 다이어리는 저장소다. 공부를 할 때 예습과 복습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처럼, 계획을 세우거나 메모를 남기면 다시 한번 보는 게 중요한데 난 쌓아두기만 한다. 오직 쓰기만 한다. 다이어리의 여백이 부족하면 새로운 시스템의 다이어리나 플래너를 찾는다. 성적이 오를 거라는 기대감에 문제집을 바꾸거나 더 예뻐질 거 같은 믿음에 화장품을 바꾸는 것처럼 다이어리만 바꾸면 획기적으로 변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하지만 결과는 구 저장소와 신 저장소의 이질감뿐이다.


스마트폰을 쓰게 된 후론 메모장, 에버노트, 구글 캘린더 어플, 원노트 프로그램을 썼다. 개인 정보와 일정과 계획 및 정보 등을 스마트하게 관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워낙 아날로그형 인간이라서 그런지 디지털 세계에 손이 가질 않았다. 세팅에만 수많은 시간을 쓴 채 제대로 사용해본 적이 없다. 결국 여러 어플과 노트 여기저기에 기록이 뒤엉켜버렸다. 이젠 어디에 무엇이 어떻게 있는지를 몰라서 못 쓴다. 다시 써볼 생각을 하다가도 아이디랑 비번 찾을 생각을 하면 질려서 포기한다.   


올해 지금까지 내가 만들어낸 기록물은 모닝 저널 7권과 일상 노트 3권, 독서기록 노트 3권이다. 독서노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써서 한 권을 마무리짓지도 못한 채 뒤죽박죽 쓰고 있다. 그나마 아이패드를 쓰게 되면서 독서기록을 굿노트에 남기니 3권이지, 안 그랬음 독서노트가 10권은 나왔을 것이다. 인터넷 클라우드도 비슷한 처지다. 각 메일의 임시 보관함과 블로그 저장 글 목록에도 글이 쌓여있다. 글을 쓸 때 수정본을 그냥 버리지 못한다. 처음 쓴 글은 초고 1, 그다음 손댄 글은 초고 2, 거기다가 점 하나 더 찍고 문단 나눔만 해도 초고 3이다. 삭제한 부분이 혹시라도 다른 글에 필요한 말이 될지도 모른다는 집착에 버리질 못한다.


지긋지긋하다. <세상에 이런 일이> 프로그램에 한 번씩 등장하는 쓰레기집에 사는 사람들처럼 정보 쓰레기에 치여 산다. 무엇이 중한지도 모르고 말이다. 소유욕인지, 애착심인지....... 이 글을 시작할 때 정보를 '알아야 할 것'과 '알고 싶은 것'으로 나눴는데 사실, 내가 알아야 할 것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알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 게 문제 같다. 아니, 무엇을 위해, 왜, 그렇게 알고 싶은지 잘 모르는 상태가 문제다. 블랙홀이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려고 한다.


블랙홀을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 내 마음, 욕구 자체를 없애 버리면 되는 걸까? 그럼 욕구를 털어 버릴 수 있는 방법은 뭘까? 고민해보니 '앎'이 중요한 게 아니라 '생각'이 중요하다. 생각을 잘할 수 있도록 돕는지에 따라 그 정보를 남길 것일지 결정하면 정보 쓰레기가 남지 않을 것 같다. 삼켜버린 뒤 무로 만드는 블랙홀 같은 다이어리 쓰기에서 벗어나 새롭고 멋지고 근사한 생각을 탄생시키는 폭발이 일어날 수 있는 무 혹은 여백이 되는 다이어리를 쓰는 습관을 가져야겠다.


한편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노션 때문이다. 모든 정보 관리를 노션으로 통일하겠다고 나섰는데 또 샛길로 빠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찾다 보니 이 글이 나왔다. 내가 빠져버린 샛길은 원래의 길에서 훨씬 갈래길이 많아진 미로 같은 길이다. 지금 작업하는 것에 대한 정보와 쓰고 싶은 글감만 모아두는 저장소를 만드는 게 목적이었는데, 하나둘 추가하다 보니 나의 모든 것을 담아두고 싶어 졌고, 항목 목록이 거대해졌다. 더 추가할 것은 없는지 계속하여 찾고 있다. 그리고 잘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인터넷을 헤매고 있다. 간소하게 만들려고 했는데 더 복잡해지는 아이러니라니.......


원점으로 돌아가서 버려야 할 것을 가려내려고 하니, 모든 항목이 이미 노션이라는 판에 쏟아진 물과 같아서 추스리기가 너무 어렵다. 일단 놔두고 노션을 계속 쓰다 보면 자연스레 간추려지려나? 노션에서 도망만 안 가면 되는 걸까? 아니면 글을 쓰며 생각한 대로 '생각을 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기준으로 가려내야 하는 걸까?

 

한 번에 하려고 하는 것도 문제인가 보다. 강신주 작가의 말을 빌어보자면 나는 유랑하는 존재다. 나의 건강 및 정신 상태, 관심사, 상황은 계속 변할 것인데 한 번에 노션의 항목을 고정시키는 것도 문제다. 그저 이번만큼은 노션에서 도망가거나 방치하지 말고, 꾸준히(!) 쓰면서 시시때때로 변하는 나에게 집중해서 나의 목적에 따라 관리해봐야겠다. 그리고 1달 뒤 '나의 한 달 노션 사용 후기'라는 글을 써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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