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1더하기n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주얼페이지 Mar 04. 2021

우리의 미래는 수렵사회일까?


우리는 수렵채집사회로 돌아가는 것일까?


알릴레오 북스의 <침묵의 봄>편에서 유시민 이사장님이 기후난민이 증가하고 있고, 이 난민들을 막기 위해 총을 쏴서 마구 죽이는 상황이 올 수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 나는 '우리가 지금 수렵채집사회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하고 생각했다. 아프리카나 중남미의 수많은 사람들이 유럽과 북미의 국가로 들어가기 위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강과 바다를 건넌다. 이들이 원하는 건 단 하나다. 생존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떠난다. 안정적으로 먹을 것을 얻기 위함이 유일한 목적이라면, 이 점에서 난민과 원시수렵사회의 원시인들이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원시인들은 먹거리를 구하기 위해 이동하면서 채집하고 사냥을 했다.


우리의 미래는 수렵사회로의 회귀인 것일까? 우울했다. 비록 지금은 따뜻한 집과 음식을 누리며 가족과 함께 안락한 생활을 하지만, 기후환경이 변하고, 쓰레기가 쌓이는 이런 상황에서 언제까지 이 편안함과 안전을 누릴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순서와 시기는 정해져 있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내게 닥쳐올 미래가 아닐까?


그러다가 생각했다. 우리 사회는 그 원시사회와 지금은 분명 다르다. 국경이 있다. 국경이 난민들의 행로를 막고 있다. 국경이 있기에 총으로 쏠 수 있다. <총,균,쇠>에 따르면 원시 수렵사회에서는 부족 내 혹은 부족 간의 사람들은 평등했고, 가깝든 멀든 친인척 관계를 통해 평화를 유지했다. 농경사회에 들어서면서 계급과 부족 등 사회의 경계가 위로 옆으로 생기면서 무력충돌이 생겼고, 경계를 지키기 위해 각종 이데올로기 등이 나타났다.


원시인들은 먹이를 찾아 이동할 때, 위협적인 동물이나 미리 와 있던 사람들을 피하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현대의 난민들은 그럴 수가 없다. 내가 있던 자리에서 벗어나면 국경이 가로막고 있다. 갈 곳이 없다. 국경을 넘더라도 위협적인 존재로서 받아들여진다. 사막의 부족들은 환대의 습성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대개 그렇지 않다. 사막부족은 유목사회여서 상호호혜가 기본인 반면, 현대의 대부분의 사회는 정착사회다. 이방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기후변화나 환경재난으로 인한 채집수렵사회가 우리의 미래라면, 경계짓기나 이방인을 타자화하는 문화를 그대로 둬도 되는 것일까? 우리의 미래가 떠돌이라면 어떻게 적응하거나 변해야 할까? 아, 그러고 보니 코로나19 바이러스 유행 직전만 해도 노마드적 삶은 장밋빛 미래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전세계가 하나의 경제와 생활로 묶여서 경제적 풍요로움을 나누는 미래. 나도 그땐 그런 희망찬 미래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 이면의 암울한 미래가 더 눈에 띈다.


여기서 내가 가진 생각에 문제가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요즘 읽은 책들이 있어서 그런지 자연스레 이렇게 흘러갔다. 내가 기성체제의 어떤 언어로 사고하고 있어서 한계에 부딪힌것일까? 음, 한계가 무엇인가..... 기성체제의 언어는 가부장제, 자본주의, 민족주의, 민주주의 이런 것들을 둘러싼 말이다.


수렵시대의 개인과 현대사회의 개인은 다르다. 수렵사회의 개인은 개인의 생존권,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행동하지만, 현대사회의 개인은 여러 층위의 의미의 개인이다. 개인이기 이전에 국민이나 노동자 등의 이름이 앞세워진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개인은 경제활동을 하는 성인이여야 하는데, 경제활동권을 빼앗긴 난민은 개인이 아니다. 정희진 작가의 <페미니즘의 도전>에 따르면 '쓸모없는 존재들'이다. "인간의 존재가 자본주의를 거치면서, 개인에서 타자로 다시 잉여로 축소된 것이다."


사회는 난민들을 잉여로 보는데, 내가 순수하게 원시사회의 수렵채집인으로 본다면 이건 음, 명백히 환원적 오류이다. 난민을 수렵채집인으로 보기에 앞서, 그들을 잉여로 보는 사회 자체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국가가 없는 국민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주체인 이동하는 유목민이 아니라 어디에도 존재가 등록되지 않은 기민, 즉 잉여이다." 우리는 "당신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고 정희진 작가는 말한다. 한편 이 질문은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 만연화된 타자혐오를 다루는 책인 <나와 타자들>에서도 나온다. "너는 네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총,균,쇠>에서 저자인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뉴기니의 친족 부족 집단사회에서는 서로 모르는 사람이 만나게 되면 "으레 친척들에 대한 긴 토론부터 했다"고 말한다. 서로를 해하지 않기 위해서 어떤 관계가 있는지 밝히는 데 애를 썼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원하든 원치않든간에 움직여야 하고, 움직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때마다 뉴기니의 전통부족처럼 혈연관계를 따질 수는 없다. 그들과 나의 공통점을 찾아 볼 것이 아니라 이런 사회 속에서 '너는 네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를 물어봐야 한다. 너는 먹을 것을 점점 구하기 어렵고, 자연재해가 반복되는 세상에서 늘어나고 있는 '타지를 떠도는 삶'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러면 난민들에게 총을 쏘는 상황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왜 가부장제 사회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