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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주얼페이지 Mar 22. 2021

힘들 땐 필터를 바꿔보자.

달리기와 피아노 연습을 하면서 얻은 깨달음

'나는 달린다. 매일 아침 아이들을 유치원 버스에 태워 보내고 운동장을 달린다.'라고 내년에도 말하고 싶다. '나는 달리는 사람입니다.'라고 5년 뒤에도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달리기는 피아노 연습과 더불어 나의 하루의 양대 기둥이 되었다. 매일 아침 하루를 계획할 때 피아노 연습과 달리기를 언제 할지 먼저 정해놓는다. 이제 겨우 700 m 트랙 3바퀴 도는 수준에, 이만큼 달리는 것도 매우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이 너무 행복하다. 달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상쾌하고 뿌듯하다. 매일 저녁식사 때 가족들에게 그날의 달리기와 피아노 연습에 대해 말한다. 가족들의 격려와 관심은 나를 기쁘게 한다.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을 갖게 한다. 나에 대해 말할 거리가 생겨서 행복하다.  


피아노와 달리기는 반복해서 뭔가를 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내게 다른 도전을 던져준다. 매일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 피아노를 친다. 같은 곡을 적어도 열 번에서 스무 번 정도 반복해서 치고 익숙해지면 책장을 넘겨 다음 곡을 친다. 짧고 단순한 곡이지만 손이 익을 때의 기분이 너무 좋다.


오늘은 새로운 느낌을 얻었다. 눈은 악보를 보고 있는데도 피아노 건반 위의 내 손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내 손가락이 바삐 움직이는 게 보였다. 신기했다. 마치 화각이 넓어진 기분이다. 어제까지는 악보만 피사체로 잡던 내 눈이 이제는 악보 아래의 건반과 손까지 피사체에 포함시켰다. 거기에 더해서 어릴 적 피아노를 신나게 칠 때의 감각도 살아났다. 화각이 넓어진 눈으로 나는 이제 피아노를 칠 때 눈과 손의 연결을 감각적으로 느낀다.

 

반면 달리기는 아무리 달려도 화각이 넓어지지 않을 것 같다. 매일 똑같은 장소를 앞만 보고 달리기 때문이다. 대신 필터가 바뀐다. '마음'이라는 필터. 달리기를 할 땐 내 마음속에 늘 전쟁이 일어난다. '여기서 멈추고 조금 걸어갈까? 아니, 저기 가로등(혹은 저기 벤치)까지 조금만 더 힘내 볼까?' 또는 '두 바퀴만 뛰어도 충분해. 아니야, 이제부터 한 바퀴 더 뛰어야 운동이 되지.' 이런 식으로 티격태격 다투고 있다. 내 마음에 따라 달리기가 쉬워지기도 하고, 따분해지기도 한다. '내 마음' 필터에 따라 한 바퀴 돌고 나서 찍힌 인상과 두 바퀴 돌고 난 후, 혹은 세 바퀴 돌고 난 후의 인상은 다르고, 또 매일매일 다르다.

세 바퀴를 뛰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지난주 금요일을 생각해보면 막상 세 바퀴를 뛰는 건 생각보다 큰일이 아니었다. 오늘 아침도 세 바퀴를 뛰었다. 두 바퀴를 거의 다 돌 무렵부터 한 바퀴 더 뛰겠다고 마음먹는 순간까지 정말 내 마음속 전쟁은 격렬했다. '더 뛴다고 죽는 것 아니다. 뛰다가 정 힘들면 걸으면 된다.'라고 마음을 먹고 뛰었다. 5바퀴 혹은 30분 달리기라는 목표가 있기 때문인지 '성실'의 필터 혹은 채찍이 더 힘이 셌다.  


피아노는 아직 고비가 오지 않았다. 곧 복잡한 악보가 등장할 것이고, 왼손과 오른손의 부조화 때문에 연습이 괴로워질 것이다. 게다가 그때쯤이면 넓어진 화각이 이미 익숙해져서 지겨울 것이다. 반면 달리기는 매일매일 나와의 싸움의 연속이다. '오늘은 이만큼만 뛰어도 충분하다. 아니다, 더 뛰기로 했으면 뛰어야 한다. 아니다, 이만큼 땀났으면 충분하다, 더 뛸 수 없다. 아니다, 그래도 더 뛰어!' 싸움 후에는 새로운 필터가 추가된다. 새로운 필터는 새로운 인상(사진)과 성취감을 남긴다.


다행히, 피아노 연습에는 레슨이 있다. 굳이 또 카메라에 비유하자면 '선생님의 조련'을 조리개나 셔터스피드와 같은 기능으로 맞춰볼 수 있겠다. 그런데 조련을 잘 받기 위해서는 예습과 복습을 열심히 해야 한다. 결국 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오토 모드에서 끝이다. 넓어진 화각으로 조금 더 많이 담아낼 수 있을 뿐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오늘 아침 달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너무 힘들었다. 샤워를 하고 나서 피아노를 치러 가려고 운전대를 잡고 앉아서도 숨이 가쁜 느낌이었다. '아 너무 힘들다. 이렇게 힘든데 계속할 수 있을까? 곧 여름이 될 텐데, 뜨거운 햇살 아래 뛰러 나가려나?' 걱정은 저 멀리까지 뻗어나갔다. 이참에 여기저기 매일 달린다고 소문을 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동네방네 만나는 사람마다 이야기를 해두면 나의 가족들의 관심이 지난 2주간 동력이 된 것처럼, 누군가의 관심이 또 동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매일 같이 달릴 사람이 있어도 좋겠다고 궁리도 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달리는 사람'이라고 소문내는 글을 써보자!


이 글을 쓰고 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겠다. 달리기든 피아노 연습이든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내 속도대로 자유롭게 할 수 있어서 즐거운 것이다. 뭐든 나 하기에 달렸다. 화각을 넓히고 조리개와 셔터스피드 기능을 익히고, 필터를 만들고 이 모든 것은 나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다. 힘들 땐 혹은 멈추고 싶을 땐  필터를 바꿔보자. '가벼운 발걸음(또는 마음)' 필터로. 내가 원하는 대로 피아노가 안 쳐지면 '선생님' 조리개를 동원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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