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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주얼페이지 Mar 19. 2021

피아노에 빠져들었다.

단2주일 만에

와!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온다. '내가 유튜브에서 피아노 연주곡을 찾아 듣고 있다!' 배경음악으로 틀어 놓고 일을 하는 게 아니다. 오로지 연주를 듣기 위해서다. 피아니스트들의 손과 얼굴, 몸짓을 보기 위해서 방금까지 아이패드 화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너무 놀랍다.


이번 주 월요일 오후, 아이들을 데리러 나가려고 준비를 할 때 둘째 딸의 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다. 감기에 걸렸는지 둘째의 얼굴이 콧물과 눈물범벅이라고 말씀하셨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병원에 데려갈 채비를 하고 나가서 아이들을 받아서 병원으로 급하게 갔다. 다행히 감기였다.


이제야 '다행히 감기'라고 쓰지만, 코로나 시국에 감기에 걸리다니.... 걱정이 한 짐이었다. 걱정도 걱정인데 이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낼 순 없게 되어서 마음이 음... 쫌 그랬다. 매일 하던 피아노 연습과 달리기를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들 걱정과 나의 일과 생활의 상실이 겹쳐져서 많이 슬펐다. 코로나만 아니면 유치원에 보내도 될 만큼 가벼운 감기인데, 피아노도 못 치고 꼼짝없이 집에 있어야 한다는 게 속상했다.ㅠㅠ


다행히! 아이들은 금방 감기에서 벗어났다. 어제 병원에 데려갔더니 더 이상 약을 안 먹어도 되겠다고 하셔서 오늘 아침 버스를 태워 보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공원에 내려가서 2 바퀴를 뛰고 집에 왔다. 매우 행복! 집에 와서 씻고 정리 좀 해두고 피아노 학원에 갔다.


한 시간 레슨을 받았다. 진도를 쑥쑥 빼주셨다. 칭찬도 엄청 받았다. 노래 부르고 춤추고 악기 다루는 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기에(피아노를 어릴 적에 친 건 지금의 '나' 아닌 다른 '나') 선생님의 폭풍 칭찬이 쑥스럽기만 하다. 진심이신가 여전히 의심만 한가득이지만 칭찬에 기분이 매우 좋은 건 사실이다!


피아노가 이제까지 여자 악기라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남자 악기라고 말씀하셨다. 어릴 땐 남녀 연주 간에 큰 차이를 모르는데 청소년기를 넘어서면 힘이 달라진다면서 손과 힘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그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이가 떨어져 있는 건반을 오가려면 손도 커야겠고, 손 모양도 좋아야겠고, 지지대가 되는 손바닥도 단단해야겠고, 건반 누르는 힘도 세야겠고, 등등. 남자가 표현하기 더 좋은 악기일 수 있겠다. 피아노가 새롭게 보였다.


선생님의 설명을 들은 후, 건반 하나하나 꾹꾹 눌러가며 소리 내는 나를 보니 피아니스트들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건지 깨달음이 왔다. 피아노라는 악기를 이해하고 곡을 연구하고 해석하는데 쓴 시간들이 얼마나 될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감탄스럽다. 연습하느라 손가락 끝 부분의 살갗이 벗겨졌었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피 묻은 건반이 연상되기도 했다. 피아니스트들이 쏟은 땀과 피가 연주에서 뚝뚝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어린 시절 피아노를 배우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세계에 있는 것만 같다. 그땐 악보를 읽고 선생님이 지시하는 대로 박자나 강약을 맞추고 건반을 치느라 피아노라는 악기를 제대로 음미하지 못했다. 엄마와 선생님의 눈치를 보고 주눅이 들어서 피아노 앞에 앉았는데, 이젠 그렇지 않다. 


피아노라는 악기와 사랑을 시작하는 기분이다. 틀려도 괜찮다는 여유도 생기고, 친구와 진도 경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피아노 경연 대회 같은 목적을 위한 배움이 아니라 오로지 피아노라는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는 기쁨 하나로 사랑에 빠져들고 있다.


배움에는 다 때가 있다는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때라는 건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때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가 피아노 학원을 다니기 시작하면 적어도 3~4년은 배우도록 할 생각이다. 나의 강요로 아이가 피아노를 배우는 건 나의 잘못된 길을 그대로 밟는 실수를 범하는 것 같지만, 난 다르게 할 것이다. 


피아노를 잘 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재능이 있으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즐길 수는 있다. 딸들이 피아노라는 악기 자체와 그 소리에 관심을 갖고 감정을 표현하고 소통하는 방법으로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싶다. 그리고 대가들의 음악에 대한 헌신과 사랑에 공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건 내가 즐기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같이 즐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내가 어릴 적 피아노는 피아노 학원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이었고 일상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었다. 지금은 연주회에 쉽게 갈 수 있고 유튜브로도 유명 연주자들의 연주를 찾아볼 수 있고, 원한다면 피아노를 살 수도 있다. 피아노는 일상 속에 녹아들 수 있다. 우리는 오래오래 피아노를 즐기면서 배울 것이다.  


피아노를 다시 처음으로 치고 오던 날, 나는 예전의 일이 떠올르면서 클래식 음악을 찾아 즐겨 듣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학부에서 미술사를 배울 때 각각의 시대별 화풍과 활동작가와 역사적 배경을 외우며 머리로 미술 작품을 익혔다. 미술관에서 내가 하는 일은 작품의 특징을 읽어내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가 한 지역 작가의 스튜디오에서 그림을 배울 기회가 생겼다. 그림을 그리게 되자 액자 속의 그림이 단순하게 물감으로 색칠한 그림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아는 만큼 보였다. 내가 내 그림 한 장을 그리면서 고민하는 시간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화가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작품을 구상했을지 상상하게 됐다. 그들의 고뇌가 내 가슴에 와 닿게 됐다. 피아노를 치는 것과 그림을 그리는 것, 겪어봄으로써 새로운 세상으로 나는 갈 수 있게 됐다. 


생각보다 이 희열이 빨리 찾아왔다. 단 2주 만에 이렇게 사랑에 빠질 수가...... 그래서 더욱 놀랍다. 손열음의 연주 영상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한참을 빠져들어 보는 나를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 내가 참 낯설지만 그럼에도 너무 행복하다. 이 기분을 꼭 남겨 놓고 싶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사랑에 빠져드는 이 기분, 정말 좋다. 


내년 이맘때의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 어떤 곡을 연주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지금보다는 더 복잡한 악보를 연주하고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 사실 무슨 곡을 치고 있는지는 상관없다. 그냥 건반 위에서 손을 놀리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리고 코로나로부터 해방되어서 연주회를 즐기고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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