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 진행하고 싶은 프로젝트가 많다. 필사 프로젝트, 책 쓰기 프로젝트, 비주얼씽킹 프로젝트 등. 내가 이렇게 바쁜 걸 남편은 알까? 내가 집에서 빈둥거린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니 시시때때로 잘 있냐고 카톡을 보내겠지?"
어제 모닝 저널에 쓴 내용이다. <마샤가 학교에 간 사이>라는 아이들 그림책이 떠올랐다. 마샤라는 아이의 집에 사는 라이오넬이라는 고양이가 화자가 되어 마샤가 학교에 간 사이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알려주는 내용이다. 신문을 읽고, 운동을 하며, 그림을 그리고, 요리를 해서 점심을 먹고, 피아노 연주회를 하는 등 무척 바쁜 하루를 보낸다. 라이오넬은 마샤가 집에 오는 기척이 나면 잠들어 있는 척한다. 하루 종일 부산스럽게 움직인 것을 전혀 내색하지 않는다. 왜 그런 것일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따분해 보이면 마샤가 재밌게 놀아줄 거라는 기대감에? 혼자 재밌게 놀았다는 사실에 마샤가 질투할까 봐? 왜? 왜?
내가 라이오넬처럼 느껴졌다. 나도 아이들과 남편이 집을 비운 시간 동안 달리기를 하고, 피아노를 연습하고,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청소를 한다. 그리고 음악 연주를 찾아 듣고,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하지만 나의 가족들은 나의 이렇게 바쁜 하루에 대해 알지 못한다. 자세히 말하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고, 무엇을 말해야 할지 말할 줄 몰라서 그렇기도 하고, 바빠서 말할 시간이 없기도 하다. 그리고 아이들의 하루에 비해 나의 생활은 조금 관심이 떨어지기도 하니깐. '라이오넬의 속내가 무척 궁금하고, 그 행동의 그럴듯한 이유를 찾고 싶다'라고 쓰며 끝냈다.
모닝 저널을 다 쓴 뒤 요가를 했다. 남편은 여느 때처럼 출근하고, 아이들은 유치원에 갔다. 난 달리기를 한 후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한 시간 동안 레슨을 받은 후 혼자 연습을 하려고 연습용 피아노로 옮겨 앉았다. 핸드폰을 확인했더니 남편의 부재중 전화가 여러 개가 보였다. 무슨 일이냐고 카톡을 보냈더니 반차를 쓴다고 했다. 당황했지만, 피아노 레슨의 여운 때문인지 크게 신경 쓰이진 않았다. 새로 연습하게 된 곡을 잘 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남편이 학원 앞까지 올 때까지 피아노를 치겠다고 했다. 30분 여를 연습한 후 남편을 보러 갔다. 왜 일찍 나왔냐고 물었더니 '그냥 몸이 안 좋은 거 같아서'라고 한다. 점심은 먹은 줄 알았는데, 먹지 않았다고 한다. 남편은 분위기 좋은 곳에 가서 외식을 하고 싶다고 했다. 로맨틱한 부부의 데이트를 꿈꾸며 반차를 쓰고 나온 듯했다. 나는 이제 슬슬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동상이몽'이라는 악몽의 시작.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 나는 아이들이 없는 시간에 더 바쁜데, 친정엄마나 신랑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는 내가 혼자 있다가 우울증에 걸리거나, 점심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아서 건강을 잃을까 걱정하신다. 신랑은 나를 한가하고 팔자 좋은 아줌마로 본다. 평일 언제든 본인이 쉬고 싶을 때 집에 오면 내가 두 팔 벌려 대환영을 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눈치다. 그래서 언젠가는 한번 서프라이즈처럼 짠 하고 나타날 줄 알았다.
난 전혀 반갑지 않다. 본인의 존재가 선물처럼 느껴지게 하려면 선물을 준비하는 노동이 있어야 할 텐데, 전혀 준비가 없다. 내가 필요한 것을 도와준다거나, 정말 로맨틱 데이트라면 데이트 계획을 짠다거나 등의 노력이 없다. 깜짝 등장에 그칠 뿐, 이후 나의 시간과 노동을 가져간다. 몸이 좋지 않아서 집에 일찍 오는 것이라면 스스로 휴식하고 재충전했으면 좋겠는데 나의 시간과 노동을 앗아간다.
이제 라이오넬을 이해한다. 라이오넬은 마샤의 이해나 관심이 필요 없다. 마샤에게는 라이오넬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라이오넬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즐겁게 지낸다. 나 역시 그렇다. 남편과 엄마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 의미를 찾아서 열심히 즐겁게 산다. 생각하고, 꿈꾸고, 의지를 갖고, 숨 쉬며 살고 있다. 혹여라도 내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그것 역시 내가 살아가는 방법일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라이오넬이 마샤가 집에 왔을 때 잠자코 있는 것, 혹은 자신이 즐거운 시간을 보낸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은 마샤에게 자신의 방식에 대한 이해를 요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장소 속에서 '그냥' 살아가고 있다. '그냥.'
엄마와 남편에게 나의 글쓰기나 취미생활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려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이제 그러고 싶지 않다. 엄마에게는 내 걱정이 엄마의 소일거리다. 매일 걸려오는 엄마의 전화를 받아서 대화를 이어가면 된다. 내가 아무리 잘 지낸다고 한들 나의 생활은 엄마의 머릿속에서는 이해가 안 될 것이다. 남편에게 나의 글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긴 했지만 그가 검열관으로 보일까 봐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그대로 놔두기로 했다. 오해든 이해든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장소와 시간 속에서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 타인의 삶을 함부로 판단해서도 안되고, 타인의 삶에 끼어들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게 이 책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감히 짐작해본다.
남편에게는 이런 반차는 기쁘지 않다고 일러두었다. 그는 '아아, 그렇지?'라고 이해한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어떤 식으로 이해했는지 읽어낼 수는 없다. 나의 시간을 나누려면 그에게도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소심한 나는 겁이 나서 말할 수 없다. 이미 매우 서먹한 사이가 되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