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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주얼페이지 Mar 25. 2021

너희 둘 다 소중해.

맏이의 인정투쟁

지난 주말 큰애랑 작은 애 둘이서 놀다가 투닥투닥하더니 작은 애가 삐져서 텐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큰 애는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는데, 곧 텐트 앞으로 가서 동생을 달래기 시작했다. '같이 뭘 하자, 지금 나오면 뭘 줄 수 있다'는 식으로 꼬셨지만, 작은 애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큰 애가 부엌에 있던 나와 거실에 있던 남편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나 잘했죠?" 이어서 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자기도 어린아이지만 동생을 위해 참는다, 엄마 아빠를 돕기 위해 나서서 동생을 달랬다, 동생을 달래는 건 매우 힘들지만 노력했다.'와 같다. 사실 동생을 화나게 만든 건 큰 아이이고, 동생의 화가 풀린 것도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노력했으니 칭찬해달라는 큰 아이의 말을 그대로 따르자니 둘째에게 미안했다. 마지못해 잘했다고 칭찬을 해줬다. 칭찬을 해줄 만하다고 여겨지지 않았지만, 칭찬을 해주지 않으면 첫째마저 토라져서 일이 커지게 될 것이 눈에 뻔했기 때문이었다. 첫째는 그런 칭찬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자신이 한 일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때 이 말이 떠올랐다. '가해자의 피해자화.'


둘째가 제 언니를 보고 있으면 '언니가 잘못했잖아. 그러고선 달래주는 척하고선 생색만 내고 있네. 게다가 칭찬까지 받고 있잖아? 그럼 난 뭐야!?' 하고 생각할 것만 같다. 첫째가 약삭빠른 편이어서 작은 애를 많이 챙긴다. 첫째보다는 둘째의 입장에 동일시하게 된다. 대개 규칙을 만들고 몫을 나누고 놀이를 주도하는 건 큰 애이고, 그걸 따르는 게 일인 작은 애가 안쓰럽기 때문이다. 작은 애가 제 마음대로 하거나 큰 애의 놀이에 동참하지 않으면 큰 애가 화를 내고, 둘째는 곧 풀이 죽어서 자리를 뜨는 게 일상이라서 작은 애의 기분을 더 살펴보게 된다.


내가 첫째를 이렇게 인식하면 첫째는 억울하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억울하겠다. 큰 아이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인정투쟁'이 아닐까. 동생에게 빼앗긴 엄마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 엄마가 인정할 만한 일을 한다. 동생을 데리고 놀고, 착한 일을 하면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엄마가 이렇게 색안경 끼고 본 줄 알면 얼마나 속상할까.   


나는 매우 가부장제적인 집안의 첫째 딸로 태어났다. 딸이니깐 남동생을 엄마처럼 보살펴야 하고, 집안의 맏이니깐 아랫 동생을 잘 이끌어야 했다. 태어난 순서 때문에 맡겨지는 그런 역할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아서 '언니니깐~ 동생이니깐~'와 같은 말은 하지 않는다. 내가 동생과 잘 어울려 놀고 있으면 그게 당연한 것이었고, 그래서 칭찬을 받을 수 있었다. 동생과 싸움을 벌인 날에는 계집애가 혹은 누나가 왜 그 모양이냐고 혼이 크게 났었고, 동생은 무사했다. 동생이 잘못을 하면 연좌제에 엮이듯 없던 잘못까지 찾아내서 벌을 주곤 하셨다. 그래서 더더욱 나는 첫째 딸에게 그런 굴레를 씌우고 싶지 않다. 첫째가 인정투쟁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는 그 존재만으로 소중하다. 내게서 인정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려면 내가 바뀌어야겠다. 글 초반에 말했듯 첫째보다 둘째에게 더 관심을 주는 편인데, 그러면 안 되겠다. 딸들이 다투면 '언니 대 동생' 간의 욕구 갈등이 아니라 '아이 대 아이'의 갈등으로 읽도록 신경 써야겠다. 첫째가 한 번씩 물어본다. "엄마는 맨날 동생만 신경 써주고 나는?" 내 대답은 늘 이렇다. "너 요만할 땐 지금 동생한테 해주는 것보다 훨씬 신경 써줬어. 지금 니 동생은 니가 받던 관심 절반도 못 받고 있는 거야." 이 말이 크게 위로가 됐는지 모르겠다. 위로가 안되니 매번 물어보겠지? 동생이라서 더 사랑받는 게 아니라서 어리니깐 손길이 더 갈 뿐임을, 자신은 조금 더 컸기 때문에 자유와 책임을 배워가고 있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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