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주얼페이지 Dec 02. 2021

완벽과 한계 사이에서 '한번 더!'

피아노를 계속 열심히 치고 있다. 3월에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잘 치고 싶은 마음은 똑같은데, 아니 치면 칠수록 더 잘 치고 싶은 마음은 더 커져가는데 실력은 그만큼 비례해 늘지 않는다. 이 불일치의 원인을 찾으면 늘 두 개의 이유가 등장한다. 쑥스러움과 대충 하는 습관.       


봄에 동요를 연습할 때는 한 주에 한 곡에서 두 곡 정도 휙휙 진도가 나갔는데, 소나티네와 뉴에이지로 넘어온 뒤로 느려졌다. 이제 한 곡을 시작하면 평균 한 달 정도 연습을 한다. 원장님은 매번 지금 연습하는 곡이 어려운 곡인데 잘 따라오고 있다면서 칭찬을 많이 해주신다. 칭찬을 받을 때면 쑥스럽다. 믿어도 되는 건지 의심스럽다. 왜냐면 다음 곡으로 빨리 보내주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악상의 표현이 부족하고 박자나 템포가 엉터리여서 한 곡에 오래 머무르고 있다. 원장님이 시범을 보여 주시면 마치 다른 피아노로 치고 있는 듯한 소리가 난다. 소리가 켜졌다가 작아졌다가, 울렸다가 산뜻해졌다가, 원장님의 연주는 나랑은 하늘과 땅 정도의 거리감이 느껴진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악상을 살리려면 뻣뻣한 자세에서 벗어나 유연하게 치면 좋겠다. 그런데 몸은 건반 누르는 목석 신세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제스처를 만들어내는 게 너무 쑥스럽다. 프로 연주자들처럼 온몸을 불살라 치고 싶지만, 어색하기만 하다. 이 주 정도 한 곡을 계속 연습하면 지겨워서 다른 곡을 쳐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오늘은 다른 곡으로 넘어가자고 하시려나 기대하지만 원장님은 "자, 이제 악상을 한번 살려볼까요?"라고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신다. "이미 전 악상 살렸는데요? 못 들으셨어요?" 울고 싶어 진다. '이게 저의 한계인 것 같으니, 악보를 보고 칠 줄 아는 정도면 된 것 같으니, 다른 곡으로 넘어가면 어떨까요?'는 마음속에만 묻어둔다. 내가 들어봐도 좋은 게 뭔지 아니깐, 실력의 하향화를 대놓고 요구할 순 없다. 원장님이 한 단계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외치시는 '한번 더'를 받아들인다.


이런 내 마음에 큰 아이가 경종을 울렸다. 어느 날 큰 애가 동요를 흥얼거리길래, '엄마 그 노래 칠 줄 알아." 말했더니 지금 바로 쳐보라고 했다. "악보 없으면 엄마 못 치는 거 알잖아?"라고 자랑만 하고 넘어 갈려고 했는데, 아이는 그게 칠 줄 아는 거냐고 도끼눈을 뜨고 내게 따졌다. 그렇다. 할 줄 안다고 생각했지만 스스로 제대로 할 줄 모르면 못하는 거다. 비슷하게 책도 그렇다. 글을 잘 읽지만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전달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는 움찔하게 된다. 피아노나 책이나 내가 스스로 만족하는 기준이 없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 수도 있겠다. 원장님이 이만하면 됐으니 넘어가자고 하기만을 기다리고, 뒷 표지로 책을 딱 덮는 순간을 두고, 다 했다고 표현해왔다. 얼렁뚱땅 대충 하다 보니 실력이 늘지 못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피아니스트들은 반복되는 연습의 지루함을 어떻게 견뎌내지? 그들은 완벽함은 어디쯤에서 만족하는 거지? 다른 사람들의 칭찬은 어떻게 받아들이는 거지? 초짜로서 내가 추구할 수 있는 완벽함이 어디만큼인지 궁금하다. 원장님이 만족할 때까지? 내가 지겨워서 더 이상 못 치겠다고 할 때까지? 각각의 곡에서 스스로 미션을 주고 해결이 될 때까지? 아르페지오 주법을 익힌다던지 반음계에 익숙해진다던지, 그렇게? 한편으로 완벽함은 한계와 맞닿아 있는 게 아닐까? 완벽함을 더 이상 추구할 수 없는 곳이 한계일까? 조성진이 한 인터뷰에서 동료 연주자로부터 나이가 들면 새 연주곡을 익히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조언을 들었다면서 젊은 지금 더 많은 곡을 쳐보려고 노력한다는 식의 말을 한 게 생각난다. 그들에게 한계는 무엇일까? 피아니스트들은 한계가 있을까? 한계라는 개념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대충 살던 관성에서 벗어나서 뭔가 제대로 배워보려고 하니 얼마만큼 해야 하나, 그리고 할 수 있나를 생각하게 된다. 쑥스러워하는 나로부터 도망가고 싶다, 벗어나고 싶다, 이겨내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해왔는데, 생각해보니 쑥스러움을 극복할 대상으로 여기지 말고 그대로 놔둬야겠다. 대신에 하나의 작은 미션을 내게 주고 그것에만 몰두해서 작은 완벽함이 쌓이고 쌓여 하나의 커다란 완벽함이 '쑥스러움'이라는 한계까지 맞닿을 때까지 가봐야겠다. 완벽과 한계의 경계가 허물어져있길 기대하면서.


녜녜 한번더 받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필사를 하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