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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주얼페이지 Feb 14. 2022

가라앉는 배에서 살아난 이 남자, 괜찮을까?

<모비딕> 읽기

허먼 멜빌이 쓴 <모비딕>을 읽는 것은 괴로움의 연속이었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고민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 나를 괴롭게 한 것은 지나치게 자세한 고래와 고래잡이에 대한 묘사와 스타벅의 결단 그리고 피쿼드호의 운명이었다.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여전히 고래나 고래잡이 과정에 관해 그렇게 자세하게 묘사한 이유를 모르겠다. ‘서술자인 나는 고래 잡는 배를 탈 건데, 퀴퀘크란 친구를 사귀어서 함께 배를 타게 됐다. 출항할 때까지 선장의 얼굴은 보지 못했으나, 배가 바다로 나가고 시일이 지나면서 그의 모비딕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이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예감했다. 스타벅과 그 외 여러 인물들과 지내면서 이런저런 소동을 겪는데, 스타벅의 사람 됨됨이와 에이해브 선장이 충돌이 예사롭지 않다.’ 이런 식으로 풀어나갔으면 어땠을까? 오늘날처럼 <모비딕>이 명성을 갖지 못했을까?

이 책이 출간되었을 당시, ‘고래학’으로 분류되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데 그가 고래 서술만 줄였더라도 더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이 점이 나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데, 글을 쓸 때 내가 쓰고 싶은 말을 쓸게 아니라 독자가 듣고 싶은 말을 써야 하는 것임을 명심하게 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 중 주인공을 꼽는다면 나는 단연코 스타벅이라고 말하겠다. 사람들은 에이해브 선장의 광기와 모비딕의 상징성 같은 것에 주목을 하겠지만 나로선 스타벅의 결단에 더 관심이 간다. 에이해브 선장은 이미 미쳐 버려서 분별성을 잃었기 때문에 스타벅 앞에서 파리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비딕>은 스타벅이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에이해브 선장과 배의 운명이 정해지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스타벅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두고두고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을 읽을 때 <정의란 무엇인가>도 읽고 있던 게 큰 운이었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아니었다면, 스타벅의 결정을 가볍게 여겼을 수도 있고, 뭐 어쩔 수 없지, 혹은 총을 쏘는 게 좋지 않았나 정도로 생각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스타벅의 결정을 ‘부담을 지는 자아’라는 관점에서 생각을 하게 되니, 이게 미덕이고 정의라는 것임을 머리로는 알겠는데 내 마음이 선뜻 따르지 않는 게 너무나 괴로운 것이다.


<작은 것들의 신>에서도 하층계급에 속하는 인물인 벨리아 파펜에게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이 계급을 넘어선 사랑을 했다고 자신이 섬기는 집안에 가서 고할 때도 지켜보기가 힘들었다. 공동체의 역사와 관습, 질서를 수용하는 것을 얼마나 지켜야 하는 것인지, 이런 상황이 내겐 제발 오지 않길 기도할 뿐이다.


소설의 중심이 되는 장소인 피쿼드 호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잘 돌아간다. 반역하는 사람 하나 없이 의리를 지키고, 제 역할을 묵묵히 해낸다. 그중엔 정신을 놓친 소년 핍이 있고, 고래 몸통에 빠져버린 사람을 목숨의 위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구하려 뛰어드는 퀴퀘크도 있다. 다만 그들이 에이해브 선장의 광기가 빚고 있는항해 길을 아무도 저지를 하지 않고 있는 게 속상하다. 소설 속 배 한 척 일 뿐이지만 그 배를 내가 살고 있는 공동체라고 생각한다면, 지도자 한 사람의 광기가 파멸로 몰아가고 있는 꼴이다. 스타벅과 같은 분별 있는 자에게서 어떤 용기 있는 결단만을 기다리다가는 모두가 죽음일 텐데, 어떻게 공동체는 구원받을 수 있는 걸까. 어쩌면 공동체의 운명을 스타벅 개인에게 돌리는 것도 잘못일 수 있겠다


이 책에서 반전은 이슈메일의 생존이다. 이슈메일이 에이해브 선장의 보트에 탔을 꺼라고는 생각도 못했고, 설마 피쿼드 호가 그렇게 될 줄은 전혀 몰랐기 때문에 반전의 반전 같은 느낌이다. 공동체는 가라앉았지만, 개인은 요행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일까.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면, 당연한 결과일까? 이슈메일이 이 사건에서 배운 것이 있을까? 그가 누구의 목숨에도 슬퍼하지 않고 여전히 고래에만 빠져서 이 책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런 공동체는 그만큼만의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스타벅의 결정을 애석하게 여길 것 같다. 스타벅을 보며 큰 책임을 한 개인이 짊어지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사회에서 살 수 있기를, 명석하고 사리분별 가능하고 부담을 지는 자아의 리더가 이 사회를 끌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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