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번째 리뷰_척하는 삶
그녀의 이름은 '끝애'다. 조선 반도의 양반댁에서 4녀1남 중 네 번째로 태어난 딸이었다. 끝애의 아버지는 네 번째로 태어난 딸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이름을 '끝애'로 지었다. 더 이상은 딸을 낳지 않겠다는 다짐이었을까. 그 바람대로 끝애의 동생은 남자아이였다. 조선이 무너지고 일본은 전쟁을 벌였다. 일본군은 끝애의 남동생을 징집하려 했다. 끝애의 아버지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 끝애를 위안부로 대신 보냈다. 끝애는 동남아시아의 정글 속으로, 이미 전쟁의 중심부에서 빗겨 난 일본군의 전초기지에 보내졌다.
소설 <척하는 삶>은 끝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위안부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끝애가 위안부로 끌려간 그곳, 일본군의 전초기지에서 만난 군의관 하타의 이야기다. 하타는 전쟁이 끝나고 일본을 떠나 미국에 정착했다. 그는 미국 뉴욕 근처의 베들리런이라는 조용한 동네에서 '닥 하타'로 불린다. 그의 삶은 평화로웠다. 그는 의료기기 대리점을 운영하면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충실하게 자신의 맡은 바 역할을 다했다. 그는 사람들의 신망을 얻고, 평화로운 삶을 산다.
그렇지만 하타의 삶은 안에서부터 철저하게 망가지고 있었다. 하타가 입양한 부산에서 온 소녀 '서니'는 그를 떠난다. 하타에게 애정을 느꼈던 메리 번스도 그를 떠난다. 하타에게 남은 사람들은 그가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이들 뿐이다. 하타는 자신이 30년간 몸 담은 베들리런이라는 사회에서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차로 몇십 분이면 나오는 에빙턴이라는 다른 동네에서 하타는 비틀거린다. 에빙턴의 사람들은 베들리런의 사람들보다 가진 것이 적었기 때문에 좀 더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내보이면서 살았고, 그런 환경은 '척하는 삶'에 익숙해 있던 하타에게는 이질적이었다. 마치 공기의 구성요소가 다른 미지의 행성에 내리면 숨이 막히는 것처럼.
이 소설은 위안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지만 위안부를 다룬 어떤 소설이나 영화보다도 더 치밀하고 처절하다. 위안부 문제가 나올 때마다 일본 정부와 일본을 비난하는 것은 어찌 보면 손쉬운 일이다. 그들은 분명 가해자니까. 그렇지만 그 비난의 화살을 우리 자신에게로, 더 나아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게 돌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왜 우리는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에 나서는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공감하는 걸까. 단순히 그게 정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아픔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척하는 것일 뿐이다. 많은 사람이 위안부 문제를 이야기할 때마다 보이는 안타까운 마음, 그 안에는 '척하는 삶'이 있다. 나는 그 일과는 무관하다는 떳떳함, 세상일에 공명정대하게 대처하겠다는 마음가짐이 담겨 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최소한 우리의 본모습을 직시할 필요는 있다.
하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위안소 앞에 줄을 선 일본군 병사들과 자신을 분리한다. 스스로는 저들과 달리 고결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끝애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믿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하타의 마음 역시도 폭력이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사랑과 폭력은 원래 같은 의미지만, 특히 상대방의 상태와는 무관하다는 점에서 더욱 비슷하다. 사랑이나 폭력은 모두 자기 확신 행위이지 상대방의 매력이나 잘못과는 무관하다."고 말했다. 나는 이 책을 읽다 정희진의 말을 떠올렸다.
하타는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알아차렸을까. 그것을 알아차렸기에 미국으로 건너가고 한국인 아이를 입양해서 키우고 미국 중산층의 마음씨 좋은 동네 할아버지가 되려고 노력한 것일까. 그렇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하타는 위안부를 관리한 군의관이었고, 그는 끝애를 사랑했다고 믿었지만 그것은 폭력이었으며, 그가 더 큰 폭력 앞에서 방관자로 머물렀다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 기억이 평생 하타를 따라다닌다. 그는 자신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그와 아주 가깝게 지냈던 서니, 메리 번스, 몇 명뿐이다.
우리가 매주 수요일마다 느끼는 죄책감도 하타의 그것과 뿌리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위안부 문제가 우리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우리 민족이자 우리 국가의 일이라고 생각해 분노한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는 우리와 직접 관련된 문제다. 우리는 그들의 피를 대가로 살아남은 것이다. 우리는 끝애의 후애인가, 끝애가 살리려고 한 남동생의 후애인가. 우리는 씻을 수 없는 원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과 다름없다. <척하는 삶>을 읽고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하타의 삶, 하타의 모습은 우리 모두가 감추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이창래 작가는 한국계 미국인이다. 어린 시절 한국을 떠났다. 그가 이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한국을 떠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역시 한국에 계속 머물렀다면 우리의 일부가 되어 우리의 진짜 얼굴을 감추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그는 조금 빗겨 서서 우리의 '척하는 삶'을 철저하고 미세하게 해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