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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노동자에게도 고향이 있다

71번째 리뷰_제7의 인간

by 이기자

포화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그중에서도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만이 난민의 자격을 얻고 유럽에 도착한다.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과 환희는 오래가지 않는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삶이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 난민들은 이제 새로운 이름에 적응해야 한다. 그들은 이민노동자가 된다.


존 버거의 <제7의 인간>은 유럽 이민노동자의 삶을 바라본다. 이 책은 1970년대에 씌어졌지만 옛날이야기로 읽히지 않는다. 존 버거가 바라본 유럽 이민노동자의 삶은 지금 그들의 삶과 다를 것이 없다. 이민노동자를 수출하는 나라와 수입하는 나라도 달라지지 않았다. 전 세계를 거대한 소비시장으로 만들어버린 자본주의 시스템도 여전히 견고하다. 이 책은 우리 시대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민노동자들은 저개발 경제로부터 온 사람들이다. '저개발'이란 말은 외교적인 창피의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개발도상'이라는 말로 대체되었다. '개발도상'이라는 말은 '저개발'된 것과 명확히 구별된다. 어떤 경제가 저개발된 것은 그 나라 주변에서, 내부에서, 그 나라를 향해서 행해지는 일들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개발을 하는 대리인들이 있는 것이다.(23p)
저개발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강탈과 착취를 당했다는 것만이 아니다. 인위적인 울혈 증상에 걸린 채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저개발은 그냥 죽일 뿐만이 아니다. 그 치명적인 정체는 삶을 부정하며 죽음을 닮아 있다. 그 이민은 살고 싶어한다. 자신의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서, 그는 애초에 자기가 태어났던 환경 속에는 결여되어 있는 역동성을 회복하려고 애쓰는 것이다.(3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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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글이 언제나 그렇듯이 이 책 또한 세심하고 감각적이다. 그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냉철하게 파헤치면서 동시에 이민노동자의 삶에 연민의 시선을 보낸다. 존 버거가 스스로 이야기하듯이 이 책은 '꿈/악몽'에 대한 책이다. 그들의 현실이 너무나도 가혹해서 악몽이란 이름도 너무 약한 것은 아닌가, 그들의 희망이 너무도 높아서 꿈이라는 이름도 너무 약한 것은 아닌가. 존 버거와 함께 이민노동자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들에게도 고향이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와 형제와 친구들이 있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가장 똑똑하고 진취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개발도상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철저히 무시당한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 불쾌함. 덜떨어짐. 위험함. 더러움. 이런 이미지들은 누가 만들었는가. 존 버거는 이 어려운 질문에 찬찬히 자신의 설명을 내놓는다. 프랑스에서의 어느 통계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민노동자의 정신병 발병 확률이 프랑스 시민보다 두세 배가 높았다고 한다. 이런 통계조사 결과는 이민노동자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을 합리화하는데 일조했다. 그러나 존 버거는 다른 설명을 내놓는다. 이민노동자의 정신병 발병 확률이 높았다는 것은 그들이 불안과 불행으로 보통의 프랑스 시민보다 두세 배는 더 고통을 받았다는 증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현지 출신 노동자들은 이민들이 '열등한' 위치에 있다고 보는데, 그들이 듣고 보는 것은 언제나 이민들은 얼마나 다른가 하는 얘기뿐이다. 이민노동자들은 알 수가 없는 대상이라는 데에서부터 알 만한 가치 이하의 존재들 -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하며 질서가 없고 무기력하며 사악한 존재들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열등한'이란 단어 양쪽에 붙어 있던 인용부호마저 사라지게 되고, 이민노동자들의 본질적 열등성의 증거가 곧 그들이 처해 있는 열등한 처지라는 식이 된다. 그가 받는 임금이 곧 그의 인격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융합은 이미 발생했다.(150p)
도시화된 국가의 경제에 관한 한 이민노동자들은 불사의 존재, 끊임없이 대체 가능하므로 죽음이란 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태어나지도 않으며, 양육되지도 않으며, 나이 먹지도 않으며, 지치지도 않으며,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단 하나의 기능 -일하는 것- 을 가질 뿐이다. 그들의 삶의 다른 모든 기능들은 그들의 출신 국가의 책임이다.(65p)


한 무리의 건강한 남자들이 팬티만을 입은 채 일렬로 서 있다. 하얗고 빛이 잘 들어오는 방에는 의사 한 명과 간호사 몇 명이 있다. 의사는 남자들의 신체를 꼼꼼하게 검사한다. 키를 재고 손톱 밑에 반점은 없는지 살핀다. 남자들은 의사의 지시에 따라 손을 들었다가 체중계에 올라섰다를 반복한다. 검사를 받은 사람의 가슴과 팔목에는 잉크로 숫자를 표시한다. 남자들은 자신의 건강함을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한 남자는 키가 모자라다는 이유로 불합격했다. 복도에 앉아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남자들의 표정은 초조하다. 존 버거는 그 사진들을 가리키며 "자기 아이가 태어나는 동안 밖에서 기다리는 아빠의 표정"이라고 지적한다. 이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그들은 진짜 새 생명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민노동자라는 새로운 삶, 새로운 생명. 그것은 그들을 구원해줄 동아줄이다.


사진은 존 버거의 책에서 중요한 부분을 담당한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진은 본문을 설명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70년대 이민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 이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사진을 꼼꼼하게 봐야 한다.


<제7의 인간>은 한국에도 있다. 유럽에 이민노동자들이 몰려들었던 것처럼 한국으로 동남아시아 지역의 이민노동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외국인노동자로 부른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어떠한가. 위험하다. 더럽다. 무식하다. 한국 사회는 외국인노동자 없이 돌아가지 않는다. 그들이 담당하는 역할, 업무는 이제 한국 사람들이 하기에 지나치게 위험하고 불쾌하고 힘들고 임금이 적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을 비뚤어진 시선으로 바라본다.


존 버거의 책은 그들에게도 고향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그들도 고향이 있고 어머니가 있고 친구가 있다. 그들을 고향이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은 우리들이다. 우리의 시선이 그들을 고향이 없는 존재. 불사의 존재. 이름이 없는 존재로 만든다.

자본주의는 자본의 거의 무한대의 축적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생산성의 무한대의 증가를 요구한다. 그러나 시장은 언제나 생산과 정확히 일치해서 반응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불경기와 경기 신장과 인플레에 이르는 여러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불경기 동안에는 치워 두었다가 경기가 확장될 때만 끌어들일 수 있는 예비 노동력이 있어야만 한다. 예비노동력의 대부분이 이민노동자로 구성되어 있다면 그들은 필요한 때에는 '수입'을 해올 수 있고 일시적으로 남아돌 경우에는 '수출'을 할 수가 있으며, 이민노동자들은 정치적인 권리도 없고 정치적인 영향력도 거의 없기 때문에 아무런 정치적인 충격을 받을 필요가 없다. 이민은 프롤레타리아로서의 경험이 전혀 없다.
시트로엥사의 노동자로 지원해 온 사람들은 방금 프랑스에 도착했다는 증거로 차표를 보여달라는 요구를 흔히 받은 바 있다.(147p)
최종적인 귀향은 신화적이다. 그것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무의미했을 것에 대해서도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실물보다 더 크다. 그것은 갈망과 기도의 대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절대로 상상했던 것처럼은 되어 가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신화적이다. 최종적인 귀향이란 없는 것이다.(235p)


#커버이미지는 유럽 난민 사태를 찍은 2016 퓰리처상 수상작입니다.

##<제7의 인간> 낭독 https://youtu.be/NNqreVNAR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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