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이 곳이 재난의 한 복판

84_밤의 여행자들

by 이기자

윤고은의 <밤의 여행자들>을 읽었다. 여행사 10년차 여직원 요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는 얼핏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를 떠올리게 한다. <한국이 싫어서>의 주인공 계나는 20대 후반으로 종합금융회사 신용카드팀 승인실에서 꾸역꾸역 일한다. 아현역에서 강남까지 지하철 2호선의 지옥을 매일 경험하며. 그러다 마침내 호주로 떠난다. 계나는 그곳에서 자신이 원하는 삶에 가까워진다.


계나의 이야기가 해피 엔딩을 예감하게 한다면 요나의 이야기에는 행복이랄 게 없다. 그래서 더 현실적이고 섬뜩하다. <한국이 싫어서>는 페이지 터너였지만 솔직히 말해서 다음 장을 넘기는 것이 너무나 쉬워서 별로인 소설이었다. 고민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밤의 여행자들>은 역시나 페이지 터너지만 한 장 한 장을 넘기기 위해 심호흡이 필요했다. 다음 장의 내용을 어서 빨리 확인하고 싶지만 손가락이 책장에 베이기라도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책이었다. 아무래도 1980년에 태어난 윤고은이라는 작가가 그려낸 30대의 여자 직장인(요나)의 모습이 1975년에 태어난 장강명이라는 작가가 그려낸 20대의 여자 직장인(계나)의 모습보다 더 실감 나게 느껴져서가 아닐까,라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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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는 '정글'이라는 여행사에서 일한다. '정글'은 재난 여행 상품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특이한 회사다. 재난이 발생한 지역을 여행하는 상품을 만든다. 요나는 여행 상품 기획자다. 그러나 요나의 일상은 자신이 다루는 재난을 닮았다. 실적이 떨어지면서 회사의 퇴출 대상에 오르고, 상사는 거리낌 없이 성희롱을 한다. 성희롱 피해자들이 피켓시위를 하지만 요나는 불이익이 무서워 자리를 피한다. 요나는 이미 난파선처럼 재난의 한 복판을 맴돌고 있었다.


마지막 선택지처럼 꺼내 든 카드는 사표였고, 회사는 사표 대신 휴가 겸 출장을 권한다. '정글'이 운영하는 재난 여행 상품 중 하나를 다녀오고 개선점을 보고서로 작성해보라는 지시였다. 요나는 베트남 남부의 휴양지 무이로 향한다. 그곳에는 사막 한복판에 거대한 싱크홀이 생겨 원주민이 희생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수십 년 전의 재난은 잊혀 가고 여행지에 남은 재난의 흔적은 희미하기만 하다.


자연이 만든 재난이 희미해져 갈 때 인간이 손을 뻗는다. 무이의 관리자들은 재난 여행지로서의 매력이 떨어진 무이에 관광객들을 모으기 위해 인공적인 재난을 기획한다. 섬을 개발하는데 방해물이 되는 원주민들을 함께 처리하겠다는 계획이다. 말도 안 되는 학살이었지만 요나는 계획을 알고도 모른 척한다. 오히려 재난 이후 무이를 여행할 상품을 만든다. 은밀한 학살의 공범자가 된다.


결국 이 모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재난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나는 지금 살아 있다는 확신이었다. 그러니까 재난 가까이 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안전했다, 는 이기적인 위안 말이다.(61p)


요나의 삶을 망가뜨린 재난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마지막 순간 요나는 여행의 시작점을 찾으려 애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아차리려 애쓴다. 그러나 시작'점' 같은 것은 없다. 요나의 혼잣말처럼 '지금은 수많은 순간들의 연속'이다. 재난은 일상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돈, 욕망, 생존, 자본주의 이런 것들이 얽히고설킨 일상의 순간들이 이미 재난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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