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토크 창간호 그리고 릿터 2호 리뷰
사진잡지 보스토크 VOSTOK 창간호와 문학잡지 릿터 Littor 2호는 모두 '페미니즘'을 다뤘다. 문학과 사진. 서로 다른 두 개의 예술 장르가 페미니즘을 어떻게 다뤘을지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가 컸다.
보스토크는 독립 사진잡지다. 텀블벅을 통해 후원자를 모았다. 텀블벅에 올라온 목차가 마음에 들었고 나중에는 편집인 중에 한 명이 지인인 것을 알고 고민 없이 구독했다. 그렇게 받은 보스토크 창간호는 기대 이상이었다. 사실 사진예술에 대해 문외한에 가깝기 때문에 '기대 이상'이라는 반응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 보스토크 편집인들은 창간사에서 풀 스윙하는 타자처럼 잡지를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그들의 바람대로 창간호는 홈런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야구를 모르는 사람도 공이 담장을 넘어갔는지는 알 수 있다.
페트라 콜린스의 이야기로 시작해 애쉴리 아미타지, 룰라 하이어스, 메이지 커즌, 아만다 차치안 등으로 이어지는 여성 사진작가들의 작업은 흥미로웠다. 구성이 다소 단순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은 들었지만 사진 문외한이 읽기에는 오히려 편했다.
어경희 씨가 쓴 '셀피 페미니즘: 소녀취향, 그 핑크빛 코쿤에 관하여'는 굉장히 인상적인 에세이였다. 로타의 로리 소녀 이미지에 대해 여러가지로 고민하던 차에 많은 정보와 단상을 얻는 계기가 됐다. 벨라스케즈의 로크비 비너스를 패러디한 오드리 월렌의 작업은 보자마자 감탄했다. 원작인 로크비 비너스는 남성과 여성의 전통적인 권력관계의 전형이다. 여성 모델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에 빠져들어 있고 남성 화가는 이것을 그리고 있다. 존 버거는 이런 권력관계에 대해 "남자는 여자를 본다. 여자는 남자가 보는 그녀 자신을 관찰한다. 여자는 그녀 자신을 시선의 대상으로 바꿔 놓는다"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월렌의 작업은 여성 모델이 자기의 모습을 직접 관찰하며 촬영의 시점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전복적이다. 로크비 비너스 속의 여성 모델은 자신이 관찰당하는 것도 모르고 있지만, 월렌의 작업에서 여성 모델은 원격 카메라 렌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다. 어경희 씨의 지적대로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다르지 않지만 행위의 주체가 달라졌다. 월렌은 더 나아가서 셀피를 해방의 돌파구로 삼는다. "내가 나를 예뻐하고자 하는 욕망이 그들의 욕망에 선행하는 그날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셀피를 찍어야만 한다"는 월렌의 말은 간단하지만 인상적이다.
케이트 더빈의 작업도 남성의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의 연장선상이다. 그녀가 2014년에 발표한 '헬로, 셀피! Hello, Selfie!' 프로젝트는 속옷 차림에 헬로키티 스티커를 몸에 붙인 여성들이 로스앤젤레스 길거리를 걸으며 셀피를 찍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헬로키티는 일본 카와이 캐릭터의 대표주자다. 그리고 헬로키티는 입이 없다. 헬로키티를 만든 산리오의 디자이너는 헬로키티가 입이 없는 이유에 대해 "보는 사람들이 감정이입을 할 수 있도록 입을 없앤 것"이라고 설명했다. 헬로키티는 오로지 시선의 대상으로만 기획된 것이다. 헬로키티에 입을 없앰으로써 사람들은 '나의 감정을 잘 이해해주는 귀여운 캐릭터'를 갖게 됐다. 남성 사회가 여성에게 전통적으로 원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케이트 더빈의 작업에 헬로키티가 등장한 이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어경희 씨의 에세이는 아이유와 설리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자신의 인스타에 계속해서 노브라 셀피샷을 올리는 설리, 그리고 설리에게 '복숭아'라는 노래를 헌정한 아이유. 어경희 씨는 이들에 대해 "나르시시즘에 의해 추동된 자기전시행위가 어떻게 뜻하지 않은 방식으로 사회의 통념에 도전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내용들은 조금 심심하다. 수전 손택의 에세이 '사진은 의견이다. 아니, 의견인가?'에 주석을 달았지만 원문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배병우의 소나무 사진에 대한 논의는 배병우의 소나무 사진만큼이나 오래된 느낌이다. 나라하라 잇코와 스기우라 고헤이의 사진집에 대한 좌담?은 흥미로웠지만 딱 그 정도였고, 다른 두 개의 좌담도 휘리릭 넘겼다. 김현호 씨가 쓴 '핀업 걸 마릴린 먼로의 웃음과 눈물'은 잡지 후반부에서 가장 인상적인 콘텐츠였다. 두 번 읽었다. 포토로망 '이브'는 여러가지 묘사가 섬뜩할 정도로 생생해서 한 호흡에 읽었다.
중반부에 들어가 있는 여러 사진작가의 사진 중에서는 하시시 박과 황예지의 작업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창간호 표지에 들어가기도 한 하시시 박의 'Boys'와 황예지의 'Europa 시리즈'가 기억에 남는다.
쓰다보니 길어졌는데 그만큼 보스토크 창간호는 인상적이었다. 첫 타석에 초구를 받아쳐 홈런으로 이어진 느낌이다. 사진잡지인데도 사진보다 글이 많은 것도 좋았다. 사진이 딱 필요한 만큼은 적절하게 들어간 것 같다. 오탈자가 종종 보였지만 홈런타자니까...
사진잡지 보스토크가 홈런타자라면 릿터 2호는 이치로를 보는 것 같았다. 큰 임팩트가 없지만 안정적이고 실수가 없고 꾸준히 출루하는 타자. 올해는 붐이라고 할 정도로 여러 종류의 문학잡지가 앞다퉈 세상에 나왔다.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릿터를 가장 좋아한다. 안정적이고 꾸준하다는 인상 덕분인 것 같다. 텀블벅을 통해 후원금을 모은 보스토크가 창간호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다면, 릿터는 민음사라는 든든한 빽이 있으니 전략이 다를 수밖에. 그래서인지 릿터 2호는 페미니즘을 내세우면서도 위태롭지가 않다. 릿터 자신(잡지에 인격이 있는 건 아니지만)이 출판계에서 소수자가 아니라 권력을 쥔 입장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본다.
릿터는 아주 짧은 이야기인 flash fiction이 제일 앞에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여러 작가의 이야기 중에서도 김엄지의 '몸-지금 닿는 게 뭐야?'가 인상적이었다. 자궁경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낼 줄이야. 잡지를 덮고 나서도 계속 생각났다. 길을 걷다가 나도 모르게 자궁경부자궁경부자궁경부라고 되뇌는 나를 발견했다.
김현미 교수의 글은 지루했지만, 김신현경 연구원의 글은 흥미로웠다.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과 KTX 여승무원의 파업을 연결 짓는 흐름이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었다.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 한 대목만 옮겨본다.
"영화 부산행 도입부에서 여승무원은 열차 팀장에게 복장 지적을 받는다. 스카프를 고쳐 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하던 그녀는 좀비가 되기 직전의 승객을 구하고 다른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좀비가 된다. 이처럼 가장 먼저 좀비가 되는 '여성'은 생물학적 차이의 이름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으로 배제된 약자의 이름이다." -KTX 여승무원이 최초의 좀비들 중 하나인 이유, 김신현경
한국 예능 프로그램에서 여성이 소비되는 방식을 지적한 아이즈 기자의 글은 새로운 지점이 없다. 김명순 평전은 다소 지루하지만 김명순이라는 여류 소설가의 인생을 이보다 자세하게 알 기회가 또 없으리라는 생각에 끝까지 읽었다. 마지막까지 읽고 나니 남성 지식인들로부터 '분 냄새가 나는 시'라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펜을 놓지 않았던 김명순에게 존경심을 갖게 됐다.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이후는 릿터 1호의 연장선상이다. 장강명의 문학상 이야기와 이영훈의 길티픽션, 박태하의 K리그 이야기가 이어진다. K리그 이야기는 두 편 만에 팬이 됐다. 인터뷰 코너에는 시인 황인찬과 영화배우 김새벽이 나온다. 황인찬은 정말 잘 생겼고 김새벽의 인터뷰에는 몇 번 밑줄을 그었다.
단편소설에는 버지니아 울프가 등장한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준비'다. 이 소설은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오마주한 소설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나왔으니 다시 보스토크로 돌아가서 길어진 리뷰를 끝내겠다. 수전 손택의 에세이 '사진은 의견이다. 아니, 의견인가?'에는 19세기 영국의 여성 사진가인 줄리아 마가렛 캐머런이 등장한다. 캐머런은 동시대의 여성들을 찍을 때면 공상적 소재들을 이용했다. 문학이나 신화에 등장하는 전통적인 여성성을 재활용한 것이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찍은 여성이 있었다. 자신의 조카인 줄리아 잭슨이다. 그리고 그녀가 바로 버지니아 울프의 어머니가 된다. 19세기 여성 사진가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찍은 유일한 여성이 버지니아 울프의 어머니가 된다는 사실은 어쩐지 의미심장해 보인다.
* 보스토크 창간호와 릿터 2호 모두 읽는 즐거움이 넘치는 잡지들입니다. 간략하게 리뷰를 썼지만 본문을 보시면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으니 두 권 다 사서 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보스토크 창간호 https://tumblbug.com/vostok
오드리 월렌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audreywollen/
페트라 콜린스 홈페이지 http://www.petracollin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