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별장에서는 선생님이 가장 일찍 일어난다. 날이 새고 얼마 있다 잠이 깬 나는, 좁은 침대에 누운 채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선생님 기척에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머리맡에 둔 손목시계를 들고 어둠 속에서 시간을 본다. 5시 5분이다.(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9페이지)
노란 잎에 감싸인 여름 별장의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머리에 떠오른다. 저녁이 되어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졌어도 오래된 장작이 다 탈 때까지 우리는 말 없이 난로 앞에 앉아 있었다. 장작이 타고, 타다 무너지는 것을 싫증도 내지 않고 바라보며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419페이지)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몇 달 만에 펼쳐든다. 더위를 견디기 위해서다. 이 책을 보면(읽지 않고 가만히 바라본다) 나무 숲 사이를 가로지르는 선선한 바람이 어딘가에서 불어오는 것 같다. 하루 종일 쉬지 않은 선풍기를 잠시 끈다. 웅웅거리는 모터 소리가 사라지자 주택가에서 새소리와 매미소리가 들린다. 서울 한복판의 주택가에도 새와 매미가 산다. 우리는 함께 여름을 견디고 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표지부터 시원하다. 경쾌하고 산뜻하다. 책에 나오는 현관 손잡이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선생님은 현관 손잡이를 금속으로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현관문은 안과 밖의 경계선이니까 금속을 쥐는 긴장감이 있는 편이 좋지. 밖에 있는 문손잡이가 나무로 되어 있으면 실내가 밖으로 삐져나온 것 같아서 뭔가 쑥스러워."
그러니까 이 책의 표지는 현관 손잡이와 같은 것이다. 적당한 긴장감. 산뜻한 정취를 가득 머금은 적당한 긴장감이다. 여름의 한 복판을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어쩌면 긴장감일지도 모른다.
책장에서 몇 권의 소설을 더 골랐다. 여름을 견디는데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들.
잭 런던의 <야성의 부름>과 로맹 가리의 <유럽의 교육>은 시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인트버나드와 스코틀랜드 셰퍼드의 혼종인 벅, 그리고 유럽의 전장을 헤매는 야네크의 눈동자는 크고 노란 달을 닮았다. 달은 계절을 비웃는다. 습기를 잔뜩 머금어 무거워진 여름밤의 공기조차도 달 앞에서는 조용히 침잠한다.
이언 매큐언의 <넛셸>과 미셸 우엘벡의 <복종>은 음모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추리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신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들이 숨긴 것들, 마음속 깊은 곳에 정체를 감추고 있는 것들은 추리의 대상이 아니다. 그보다는 성찰의 대상에 가까울 것이다. 위스망스를 연구하는 대학교수 프랑수아는 무엇을 원하는가. 이슬람 문명이 프랑스 사회를 잠식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프랑수아는 절망하고 있는가. 프랑수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보면 아주 오래전 내 마음속에 숨겨놓고 존재조차 잊어버렸던 무언가를 깨닫는다. <넛셸>은 태어나지도 않은 주인공이 엄마의 뱃속에서 고뇌하는 이야기다. 햄릿의 또 다른 변주곡인 넛셸은 비극도 희극도 아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는 뱃속의 주인공은 사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 텔레비전과 소설식 조롱을 담은 비평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가난한 이들이나 사는 허름한 고층아파트 13층에 사는 소년은 하프시코드 레슨을 받을 수 없다. 음모와 진실은 냉장고에서 갓 꺼낸 맥주만큼이나 차갑다. 한 여름의 열기를 식혀줄 정도로 차갑다.
줄리언 반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는 아니지만, 몇 년 안에 그렇게 될 것 같은 후보 중 한 명이다. 그의 신작 <시대의 소음>은 서늘하다.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어느 해변 도시의 뒷골목을 처량한 모습의 남자가 걷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시간인데 남자의 발걸음은 어디로 향하는 걸까. 그가 남긴 발자국들, 해가 뜨고 안개가 걷히고 나면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될 발자국을 따라 걷는다. <시대의 소음>은 그런 이야기다. 짧은 여름 휴가를 떠나며 이 소설을 가지고 갔고, 결국 휴가지에서 한 일이라고는 이 소설을 뒤적거린 것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좋았다. 좋은 휴가였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