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밀라는 이제껏 내가 만난 가장 독창적이고 매력적인 캐릭터다. 소설과 영화를 통틀어 이런 캐릭터를 만난 기억이 없다. 서른일곱 살의 그린란드 이누이트 출신인 스밀라는 덴마크의 도시에서 사설탐정으로 살아간다. 스밀라는 도시와 얼음, 문명과 자연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어디에도 갈 수 있다.
스밀라는 여성인 동시에 여성에 거부되지 않는 삶을 산다. 스밀라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이웃집 아이인 이사야뿐만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기꺼이 모성을 보여줬다. 그러면서도 남성들이 힘과 권력으로 자신을 억압하려고 할 때는 그보다 더 강한 힘과 언어로 맞섰다. 스밀라는 자신의 여성성을 숨기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자신을 여성의 삶에 가두려고도 하지 않았다. 태초의 이누이트족은 성별이 없었고, 그들은 필요에 따라 성별을 바꾸며 살았다고 한다. 스밀라는 기꺼이 그러했다.
스밀라는 브람스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콘체르토의 아름다움에 눈물 흘릴 줄 알았고, 이누이트족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투쟁했고, 얼음과 빙하에 대한 연구에서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학자이기도 했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을 번역한 박현주 씨의 표현을 조금 더 빌린다.
스밀라는 냉소적인 유머와 독설, 합리적인 표현력을 지닌 냉철한 성격의 여자지만,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한없이 부드럽고 용서할 줄 아는 감성을 가지고 있다. 감상성은 때때로 스밀라를 주저앉힐 때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녀의 이성을 이끌어가는 동력이기도 하다. 근원에 대한 애정, 아이에 대한 모성, 약자에 대한 동정, 불의에 대한 분노는 이성과 감성, 둘 중 하나로 설명할 수 없고 그 둘이 혼합되어 있을 때만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스밀라는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얼음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얼음에 손을 댔을 때 뼈까지 파고들 정도로 차갑지만 어느 순간 지나면 뜨거운 기운과 구분할 수 없는 감각을 느꼈던 경험이 있다면 알 수 있다. 얼음은 차갑지만 또한 한없이 뜨겁다는 것을.
이 모든 이유와 함께 내가 스밀라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건, 그녀가 한 아이의 죽음에 천착하는 태도다. 언제 죽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스밀라는 "왜 이런 일을 하는 거냐"는 퇴어크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그 애가 왜 죽었는지 알고 싶어요."
그 아이, 이사야가 왜 죽었는지, 고소공포증이 있는 아이를 건물 옥상까지 올라가게 만들고, 결국에는 몸을 던지게 만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그 단순한 질문이 그녀로 하여금 도시를 떠나 바다로, 바다에서 다시 빙하 한가운데로 걸어가게 만들었다.
나는 스밀라를 존경한다. 한 아이의 죽음 앞에 스밀라가 보여준 태도는 3년 전의 비극 앞에서 우리 모두가 보여줬어야 하는 태도다. 나는 스밀라처럼 하지 못했다. 내가 아는 어느 누구도 스밀라처럼 하지 못했다. 퇴어크를 쫓아 그린란드 빙판을 뛰어가는 스밀라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나는 부끄러움과 사랑을 느낀다.
익트수아르포크Iktsuarpok
누군가 올까 봐 계속 왔다 갔다 서성이며 그를 기다리는 마음과 행동을 뜻하는 그린란드 말이다. 스밀라와 함께 하는 동안 계속 이 말을 되뇌었다. 나는 스밀라가 아직도 그린란드의 어느 빙판 위를 뛰어가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