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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자 Aug 14. 2018

이황과 박지원, 고전산문의 매력으로

tbs 교통방송 심야라디오 프로그램 '황진하의 달콤한 밤'의 책 소개 코너 '소설 마시는 시간'입니다.

매주 토요일에서 일요일 넘어가는 자정에 95.1MHz에서 들으실 수 있어요.


8월 5일 서른아홉 번째 방송은 고전 산문의 매력을 알려주는 두 권의 책을 소개했다.


↓소설 마시는 시간 멘트↓


ann 책 속에 담긴 인생의 지혜를 음미해 보는 <소설 마시는 시간> 오늘은 어떤 주제로 이야기 나눠볼까요?

오늘은 시계를 많이 돌려서 과거로 돌아가 보려고 합니다. 그동안 저희 코너에서 소개한 책이 문학이나 비문학이나 다 최근에 나온 작품들이잖아요. 오래된 책이라고 해봤자 몇십 년 정도죠. 오늘 소개해드릴 책은 그보다 수백 년은 더 된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에요.


ann 수백 년 전에 나온 글이라고 하니까 어쩐지 어렵고 지루할 것 같은 느낌인데요?

어렵고 지루한 책이면 제가 여기서 소개하지도 않겠죠. 제가 소개할 책을 고르는 건 일단 재미거든요. 그런데 오늘 소개해드릴 책은 수백 년 전의 글들을 모아놓은 건데도 정말 읽는 재미가 남다릅니다. 우리가 옛날 글이라고 하면 읽어보지도 않고 지루할 거라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그런 편견을 깨주는 책인 거죠.


ann 그럼 어떤 책인지 만나볼까요?

오늘 먼저 소개해드릴 책은 제목이 <한국 산문선>입니다. 삼국시대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우리 땅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문인들의 산문을 모아놓은 책인데요. 무려 229명의 작가가 쓴 613편의 글을 아홉 권의 책으로 나눠서 묶어낸 시리즈입니다. 

ann 삼국시대부터면 거의 1300년에 걸친 글들을 정리한 거네요설명만 들어도 어마어마한 작업이었을 것 같은데요?     

그렇죠. 출판사의 설명을 들어보면 2010년부터 기획을 시작해서 6명의 전문가가 8년에 걸쳐서 번역과 정리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 땅에서 활동한 작가들의 글이라고 해도 지금 우리가 쓰는 한글로 쓴 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읽기 쉽게 내용을 잘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했던 거죠. 책을 보면 원문을 번역만 한 게 아니라 해설도 달아놓고, 필자에 대한 설명도 들어가 있거든요. 이런 작업이 결코 간단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ann 책에 글이 실린 대표작가들의 면면도 굉장할 것 같은데요. 1300년 역사에서 최고의 글쟁이들만 모은 거겠죠?

맞습니다. 시대순으로 조금 소개해드리면요. 일단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본격적인 한문 산문을 남긴 걸로 알려진 원효대사의 글이 나오고요. 중국에서 반란을 일으킨 황소를 토벌하라는 글로 유명한 최치원도 나옵니다. 조선 최고의 학자들도 빼놓을 수가 없겠죠. 정도전, 이황, 조식, 허균, 박지원, 정약전, 정인보 같은 우리가 역사책에서 이름을 본 적 있는 학자들이 실제로 쓴 산문들도 책에 쭉 나옵니다. 9권의 책이 시대순으로 정리돼 있거든요. 관심이 가는 작가나 시대가 있으면 골라서 읽기 쉽게 정리해놓은 거죠.     


ann 그렇군요사실 여기까지만 설명을 들어서는 여전히 뭔가 어렵고 지루할 것 같은 느낌인데그렇지 않다는 거죠책에 어떤 글이 실렸는지를 한 번 제대로 봐야 알 수 있겠네요.     

이렇게 설명만 들으면 그럴 수도 있는데요. 책의 내용을 보면 정말 재밌는 게 많습니다. 이 책이 모두 9권짜리 시리즈라고 말씀드렸는데, 오늘 방송에서는 주로 3권 위주로 설명을 드릴까 해요. 조선시대 명종부터 선조 시절에 활동했던 작가들의 글이 실려 있는데요. 우리가 잘 아는 이황, 조식, 기대승 같은 작가들이 나와서 개인적으로도 재밌게 읽은 편이거든요.


ann 그럼 노래 한 곡 듣고 이야기해봅시다.     

스탠딩에그의 소확행입니다.


M1 스탠딩에그 - 소확행

https://youtu.be/sdktOY-MLYE


ann 한국의 고전 산문의 재발견. <한국 산문선이야기하고 있어요어떤 글들이 실려 있길래 지루하지 않고 재밌다고 하는지 한 번 예를 들어주세요.     

우리가 고전 산문, 특히 조선시대 산문이라고 하면 굉장히 고리타분할 거라고 생각하기 쉽잖아요. 유교 사상이 강하다보니까 요즘 시대에 글의 주제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고요. 근데 막상 글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게 많아요. 예를 들어서 퇴계 이황 선생이 쓴 글 중에 ‘부부의 불화는 누구의 책임인가’라는 글이 있어요.


ann 부부의 불화는 누구의 책임인가퇴계 이황 선생이 이런 제목의 글을 썼다는 것부터가 굉장히 흥미로운데요.

그렇죠. 글의 내용은 더 재밌어요. 조선시대에 칠거지악이라는 풍습이 있었다고 알고 있잖아요. 조선시대 남존여비 사상을 대표하는 풍습의 하나로 알려져 있죠. 부인을 내쫓을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되는 일곱 가지 나쁜 행동인데, 이황 선생은 이 칠거지악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설명을 합니다. 조선시대는 사대부 가문 여성은 재혼이 불가능했거든요. 그런 사회에서 부인을 내쫓는 건 이유를 불문하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칠거지악 같은 건 여성의 재혼이 자유로웠던 중국 고대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조선시대는 어쨌거나 남존여비 사회였잖아요. 이황 선생도 그걸 부정하지는 않지만, 남성이 부부 관계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만큼 부부 사이에서 생기는 불화의 책임도 모두 남성이 져야 한다고 설명을 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조선시대 유교의 가르침이랑은 꽤 다른 거죠.


ann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유교의 모습이랑은 차이가 있네요조선시대에 쓴 산문을 직접 읽는 재미가 이런데 있네요.

그렇죠. 이런 산문은 지금 우리로 치면 신문에 실리는 칼럼 같은 글이 아닐까 싶어요. 어떤 주제에 대해서 작가가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는 글인 거죠. 당대에 사회상도 그 안에 녹아 있고, 작가들의 다양한 생각도 알 수가 있고요. 우리가 조선시대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전형적인 모습이잖아요. 그 안에 실제로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는데 그걸 수백 년 뒤의 우리는 잘 알기 어렵죠. 그런 다양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바로 이런 고전 산문을 읽는 거죠. 조선시대도 꽉 막힌 사회가 아니라 이렇게 다양한 의견이 오고 가는 곳이었다는 걸 고전 산문을 읽으면서 깨달을 수 있는 겁니다.


ann 또 재밌는 글이 뭐가 있을까요?     

딱딱한 글만 있는 건 아니고요. 자연을 노래하는 글들이 고전 산문에는 많잖아요.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글들도 그렇고요. 그런 글 중에 제가 제일 좋았던 건 기대승이 쓴 ‘언제나 봄’이라는 글이에요.


ann 언제나 봄제목부터 뭔가 살랑살랑한 느낌이 나는데요.

글을 읽어드릴게요.

“회암 선생이 사계절을 끌어와 사람 본성의 네 가지 덕을 말씀한 적이 있다. 그분 말씀에 '봄은 봄이 생기는 때이고, 여름은 봄이 자라는 때이고, 가을은 봄이 완성되는 때이고, 겨울은 봄을 간직하는 때이다."라고 하였다. 봄에 생긴 기운은 통하지 않는 때가 없다.”     


ann 봄에 생긴 기운은 통하지 않는 때가 없다멋진 말 같은데요.     

올여름이 정말 더웠잖아요. 서울 낮 기온이 36도까지 올라가기도 하고요. 너무 더워서 지치고 힘든 기간이었는데, 기대승 선생이 쓴 글처럼 여름은 봄이 자라는 때다, 겨울은 봄을 간직하는 때다. 지금 덥고 춥고 하는 날씨의 변화가 견디기 힘들 수도 있지만, 결국 언젠가는 봄이 온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나마 편해질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고요. 고전 산문을 읽는 재미가 이런 게 아닌가 싶어요.


ann 래 한 곡 듣고 다음 책 만나볼게요.     

선우정아의 봄처녀입니다.


M2 선우정아 - 봄처녀

https://youtu.be/SO7L9Lwe8s4


ann 한국 고전 산문을 재밌게 읽을 수 있게 해주는 책 <한국 산문선>이야기 해봤습니다이번에는 또 어떤 책을 만나볼까요?

한국 산문선은 굉장히 대단한 기획이고 좋은 글들을 많이 모아놨는데요. 아쉬움이 있다면 한 작가의 글이 그렇게 많이 실리지는 않았어요. 13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수백 명의 작가의 글을 모으다 보니까 아무리 좋은 작가여도 한 명에게 많은 지면을 할애하기 어려웠던 것 같은데요. 그런 아쉬움을 좀 달랠 수 있는 책, 제가 생각하기에 고전 산문 중에 최고의 명문으로 꼽을 만한 글을 담은 책을 두 번째로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ann 어떤 책인가요?

바로 연암 박지원 선생의 <열하일기>입니다. 열하일기는 박지원이 중국을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쓴 일종의 여행기죠. 1780년에 청나라 건륭 황제의 70회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단에 박지원 선생이 참여했는데요. 북경과 청나라 황제의 여름 휴가지인 열하 지역을 돌아보고 난 뒤에 귀국하자마자 작업에 착수해서 3년에 걸쳐서 쓴 책이죠. 청나라 시대 중국의 문화와 제도, 사회 풍습 등을 굉장히 자세하게 기록한 데다 박지원 선생 특유의 문장력으로도 굉장히 유명한 책입니다.


ann 열하일기는 교과서에서도 배운 적이 있고아마 다들 이름은 들어봤을 것 같아요그런데 막상 열하일기를 직접 읽어본 사람은 찾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마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열하일기는 굉장히 여러 버전의 책이 있거든요. 제가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건 ㄷ출판사(돌베개)에서 나온 3권짜리 열하일기 전집인데요. 보시면 이 3권을 합쳐서 1600페이지가 넘습니다. 우리가 대작이라고 하는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같은 책도 번역서를 기준으로 1000페이지가 안 되거든요. 그런데 열하일기는 1600페이지가 넘으니까요. 결코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닌 거죠. 그래도 한 번 책을 펼쳐서 읽기 시작하면 누구나 빠져들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ann 박지원의 열하일기 어떤 매력이 있길래 이렇게 추천하는 건가요?

일단 여행기로서 재미가 대단해요. 우리가 여행기를 읽는 건 직접 가보지 못한 곳을 대리 체험하는 재미를 위해서잖아요. 그리스를 직접 가보지 못하니까 그리스 여행을 다녀온 작가의 여행기를 읽으면서 풍경과 음식, 사람들을 상상하는 재미가 있는 거죠.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보면요. 열하일기는 18세기 청나라를 여행하고 쓴 여행기라는 말이죠. 단순히 다른 공간을 여행하는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다른 시간대를 여행한 책이잖아요. 우리가 열심히 돈을 모으면 언젠가 중국 베이징 여행은 할 수가 있어도, 18세기 청나라의 북경은 죽었다 깨어나도 갈 수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열하일기를 읽으면 바로 그 불가능한 여행을 대리 체험할 수 있는 겁니다. 여기에는 박지원 선생의 글솜씨가 제 몫을 해요. 여행기는 관찰과 묘사가 정말 중요한데, 박지원 선생은 당대 최고의 글쟁이였거든요.


ann 그 유명한 허생전도 열하일기에 실린 글 아닌가요?     

맞습니다. 북경에서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옥갑이라는 곳에 박지원 선생의 일행이 머무르는데요. 그때 역관과 무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허생전도 등장합니다. 우리가 허생전이라고 따로 알고 있는 그 유명한 이야기도 열하일기의 일부분인 거죠. 박지원 선생의 글을 우리가 여기저기서 많이 접할 수 있는데, 정수를 느끼고 싶다면 역시나 열하일기를 한 번 읽어보는 게 최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M3  헤르쯔 아날로그 - 여름밤

https://youtu.be/OFBx8M-KuGE


ann 고전 산문의 재미를 새롭게 느낄 수 있게 해줄 책먼저 <한국 산문선만나봤고요두 번째로 연암 박지원 선생이 쓴 <열하일기이야기해보고 있어요아까도 잠깐 이야기했지만열하일기라는 제목은 다들 들어봤을 텐데, 막상 책을 읽어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아요어떤 이야기가 나오길래 재밌다는 건가요?     

일단 말씀드린 것처럼 열하일기는 여행기니까요. 박지원 선생의 눈으로 봤을 때 굉장히 낯선 청나라 시절 중국의 풍경을 묘사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요. 그런데 그 안에 당대의 사회상에 대한 박지원 선생의 촌철살인이 녹아 있는 거죠. 예를 들면 요술 놀이 이야기라는 게 나옵니다.     


ann 요술 놀이라면 지금으로 치면 마술 같은 건가요?

그렇죠. 중국에서는 그런 마술을 오래전부터 즐겨왔거든요. 황제의 생일이니까 중국 전역에서 최고의 마술사들이 모여서 재주를 자랑한 거죠. 요즘 사람들도 마술사들의 쇼를 보면서 굉장히 놀라고 신기해하잖아요. 18세기 조선시대 사람의 눈에는 얼마나 신기해보였겠어요. 그런 게 책에 다 묘사가 되는데요. 사실 그런 묘사보다도 마술을 정치에 연결해서 설명하는 대목이 더 흥미롭습니다.


ann 마술과 정치를 연결한다어떻게 연결 짓는 거죠?

어떤 사람이 박지원 선생에게 물어요. 그렇게 요술로 먹고사는 건 나라의 법을 어기는 행위 아니냐. 왜 그들을 처벌하지 않냐. 이렇게 물으니까 박지원 선생이 답을 합니다.

임금이 요술쟁이를 법률로 잘잘못을 따져서 막다른 길까지 추격해몬다면 요술쟁이가 오히려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숨어들어서 보통 사람들을 현혹해서 더 큰 문제를 일으킬 거다. 그렇게 되느니 요술을 사람들에게 하나의 놀이로 보게 해서 어린이조차도 요술이 그저 놀이로 여기게 하는 게 차라리 낫다고 임금이 판단한 거다. 이런 게 사람들을 통치하는 기술이다. 이렇게 설명을 한 거죠.     


ann 일리가 있는 말이네요중국의 낯선 풍경에서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를 끄집어낸 거네요.     

이런 이야기도 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18세기에도 동성애는 금기시되는 이야기였거든요. 그런데 열하일기에는 그런 묘사가 굉장히 자세하게 나옵니다. 박지원 선생의 하인이 동성애 장면을 보고 전하는 말을 그대로 책에 옮겨 적은 거죠. 이건 조선시대에 열하일기가 나왔을 때도 논란이 됐다고 해요. 그래서 이후에 나온 필사본에는 동성애에 대한 장면은 누락됐다고 하고요. 그 정도로 당대에 논란이 될 정도의 글을 박지원 선생은 가감없이 썼던 거죠.     


ann 워낙 책이 길고 방대해서 사실 다시 읽을 용기가 안 나기는 해요.     

책으로 열하일기를 다 읽기 힘들다 싶으면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아닐까 해요. 열하일기의 여정을 따라간 다큐멘터리가 여러 편 있는데요. 제가 좋아하는 건 소설가 김연수가 열하일기의 여정을 되짚은 다큐멘터리가 있거든요. 박지원 선생이 당대 최고의 글쟁이였다면, 지금 최고의 소설가 중에 한 명이 김연수잖아요. 200년이 넘는 시간을 초월해서 두 명의 글쟁이가 같은 길을 걸으며 생각을 나누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아주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겁니다.     


M4 이상은 – 삶은 여행

https://youtu.be/xVoMIDe-C2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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