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걷기_강화 나들길 8코스와 전등사
얼어붙은 바다에 어선은 갈 곳을 잃었다. 어선을 바다로 안내할 파도는 사라졌다. 갯벌과 얼음만이 어선을 에워싸고 있었다. 바다가 얼었다. 노르웨이도 일본의 북해도도 아닌 강화도 바다가 얼었다. 겨울바다의 고요함, 소리 없는 파도의 정취를 찾아온 우리는 얼어버린 바다 앞에 말 그대로 얼어붙었다. 얼음 위에 올라선 채 동력을 잃은 어선이라도 된 것 마냥, 우리는 동막해수욕장에서 얼어붙은 바다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수십 년 만의 한파가 한반도를 덮친 23일의 여행은 그렇게 말없이 시작됐다.
우리는 여행의 경로를 서둘러 바꿨다. 동막해수욕장에서 바다를 왼쪽에 둔 채 미루지돈대까지 걷는 것이 우리의 처음 계획이었다. 강화 나들길 7-1코스다. 하지만 두꺼운 외투와 히트택으로 막을 수 없는 바닷바람에 처음 계획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바다를 오른쪽에 둔 채로 걷기로 했다. 강화 나들길 8코스를 걷다 전등사에 가기로 했다. 여행의 시작점은 곧 갈림길이 됐다. 계획대로 흘러가는 여행은 없다. 여행은 돌발변수와의 싸움이고, 그 싸움을 즐기는 사람이 웃게 된다. 함정임 교수는 "우회라는 것이 여행의 중요 요소 중 하나"라고 말하기도 했다.
돌발변수가 가져다준 행운은 오래지 않아 우리를 찾아왔다. 동막해수욕장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분오리돈대에 오르자 동막해수욕장과 분오어판장이 한 눈에 들어왔다. 어선은 바다에 나서지 못한 채 얼음에 발목이 붙잡혔다. 파도의 자리는 얼음이 대신하고 있었다. 바다는 언제나 하얗고 파랬다. 다만 동막의 바다는 파도 대신 얼음이었을 뿐이다. 하얀 포말을 하얀 얼음이 대신했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돈대 위에 선 채 바다를 바라봤다. 발 묶인 어선과 제자리를 찾아가는 태양과 우리를 닮은 이름 없는 새들이 함께였다. 무엇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지 자문했다. 어선의 출항을 막는 얼음들, 우리 인생의 얼음들은 무엇인가 묻는 시간이었다.
한 편으로는 마음이 답답했지만, 한 편으로는 마음이 편해졌다. 어선들은 맹렬한 추위에도 질서정연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추위도, 얼음도, 눈도 어선들의 평온함을 깨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환경에 굴하지 않는 어선'이라는 표현이 난센스라는 것을 알면서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졌다. 분오어판장 반대편으로는 서해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얼음과 갯벌을 뚫고 몇 개의 물줄기가 바다로 이어져 있었다. 가고자 하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이 생각났다.
분오어판장을 지나 도로를 따라 몇 분을 걷자 강화 나들길 8코스 안내판이 나타났다. 우리는 차를 피해 서둘러 나들길로 들어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수지가 보였다. 빙어낚시로 유명하다는 분오리저수지였다. 저수지와 바다 사이로 작은 길이 이어져 있었다. 군데군데 해병대 진지가 만들어져 있었다. 지키는 사람이 없는 진지, 지켜야 할 필요가 없는 진지였다. 추위는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 추위가 접경지역에는 되려 평화를 가져온 듯했다.
오른쪽에는 바다가, 왼쪽에는 저수지가 있었다. 바다와 저수지는 모두 얼어 있었다. 철새가 많은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30분 남짓 걷는 동안 한 마리의 철새도 볼 수가 없었다. 초소를 지키는 군인도, 마을 주민도, 나들길을 걷는 사람도 없었다. 오로지 우리뿐이었다. 우리는 30~40m씩 떨어진 채 말없이 걸었다. 완벽해 보이는 여행이 종종 1%가 부족한 채로 끝나는 경우가 있다. 많은 경우 침묵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은 사람을 들뜨게 한다. 들뜬 감정은 자주 불필요한 말로 이어지곤 한다.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반드시 말로 표현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렇게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바람에 꺾인 억새 밟는 소리만이 우리 사이의 빈 공간을 채웠다.
고요한 억새길은 선두4리 선착장에서 끝이 났다. 이른 시간 탓인지 강추위 탓인지 선착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곳의 어선들도 얼음과 갯벌에 사로잡혀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멀리 마니산이 보였다. 어림짐작일 뿐이지만 눈길이 닿는 곳에 함허동천이 있을 것 같았다. 함허동천(涵虛洞天). 그 이름에 어울리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마니산보다 조금 더 가까운 곳에 조금 덜 높은 산이 있었다. 초피산이었다. 높이는 마니산의 절반에 불과하지만 산 정상 부분이 뾰족한 것이 쉽지 않은 산으로 보였다. 지도에 나온 숫자만으로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선두4리 선착장에서 우리는 나들길을 벗어났다. 나들길을 따라 조금만 더 걸으면 후애돈대, 선두5리로 이어진다. 강화 나들길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하지만 우리는 전등사로 길을 잡았다. 나들길을 벗어나 도로를 따라 1시간 정도를 걸어야 했다. 길을 걷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위험했다. 제대로 된 도보가 없었기 때문에 차들을 피해 갓길과 도로를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 했다. 나들길을 벗어난 것은 확실히 잘못된 선택이었다. 갈림길마다 올바른 선택을 할 수는 없다. 좋은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하며 계속 걸었다.
동막해수욕장을 출발 한 지 2시간여 만에 전등사에 도착했다. 걸은 거리는 7km 정도였다. 우리는 전등사 정문인 남문으로 들어갔다. 다른 일행들이 법당과 대웅전을 찾는 사이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삼랑성 그 자체였다. 과거에도 전등사를 온 적이 있었지만, 사찰만 둘러봤을 뿐 성곽을 제대로 본 적은 없었다.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있는 성이다. 병인양요 당시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과 싸워 이긴 곳이기도 하다. 30분 정도 성곽을 따라 걸었다. 걷는다는 표현보다는 오른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평탄한 길은 아니었다.
짧은 트래킹은 전등사를 내려오며 마무리했다. 전날의 과음과 기록적인 추위와 서울에서의 일정... 여러 가지 이유들이 발목을 잡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모처럼 도시에서 쌓인 때를 씻어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전날 술자리에서는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걷는 동안에는 침묵의 시간에 빠져들었다. 사람의 내면에는 자기만의 방이 있다. 이번 여행, 짧은 시간이었지만 걷고 침묵하고 추위와 싸우며 나만의 방을 채우는 계기가 됐다.
좋은 여행이었다.
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