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걷다걷따

서울에서 베를린 장벽을 걷다

베를린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한국 전시회

by 이기자

"그곳에는 화물을 실어나르는 바지선도, 음악이 울려 퍼지는 와중에 승객이 갑판에서 맥주병으로 건배하는 바지선도 있다. 하지만 그런 바지선에 앉아 있는 승객 대부분은 카메라를 지닌 관광객으로, 어린 학생만큼이나 주의력이 떨어진다. 그들이 무슨 사진을 찍을지 늘 궁금하다. 아마도 대부분은 '눈물의 궁전'을 찍을 것이다. 그건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을 넘나들던 월경열차의 역사였던 유리 건물로 오늘날은 텅 비어 있는데, 곧 댄스클럽이 된다고 한다. (중략)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건 사진에 담을 수 없다. 그건 베를린 장벽이 놓였던, 보이지 않는 선이다. 최고의 카메라로도 부재는 포착할 수 없으니 관광객들은 쓸모없는 장비로 똑같은 창문이 줄지어 박힌, 새 건물의 회색빛 얼굴이나 찍어댈 뿐이다."


독일 작가 다니엘 켈만의 글을 접한 뒤로 나는 베를린 여행을 꿈꾸곤 했다. 보이지 않는 선을 보기 위한 여행 말이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분단의 아픔을 겪은 독일인들에게 베를린 장벽이 가진 의미는 남다를 것이다. 그 장벽이 무너진 이후에는 독일인들은 보이지 않는 선을 언제나 마음속에 그리고 있다. 장벽이 서 있던 자리, 그리고 아직도 온전히 하나가 되지 못한 서독과 동독의 사람들 사이에 그 선이 자리 잡고 있다. 사진으로 볼 수 없으니 직접 가서 눈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선이다. 여행이란 그런 것이니까. 그렇게 나의 베를린 행이 결정됐다.


베를린 여행을 앞두고 때마침 베를린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의 벽화를 서울에서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열렸다. 베를린 장벽과 마찬가지로 남북을 가르는 DMZ를 새롭게 조명해보는 전시라고 했다. DMZ 전시관은 구색 맞추기 식인 듯 별 볼 것이 없었지만, 베를린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의 벽화 90여 점을 전시한 전시관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어두운 천장과 어두운 벽을 배경으로 전시된 90여 점의 작품들. 전시장 가운데에는 이번 전시회를 기념해 독일의 화가들이 직접 전시기간 동안 그린 새로운 작품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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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은 1961년 세워졌다. 동독과 서독은 이 장벽을 경계선 삼아 28년 동안 서로를 감시하고 저주했다. 마침내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곡괭이를 들고 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붕괴는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하지만 사람들은 준비가 돼 있었다. 그들은 장벽을 넘어 서쪽으로 향했다. 카니 알라비의 <11월에 일어난 일>은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가장 극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그의 작업실이 베를린 장벽 바로 옆에 있었던 덕분에 그는 모든 일들-사람들의 표정과 무너진 벽-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수십 년이 지난 이 작품 속 사람들은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나의 카메라는 수많은 얼굴 중 어디에 포커싱을 해야 할지 몰라서 이리저리 난처해할 뿐이었다.


화가들은 무너진 장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베를린 장벽은 하나의 상징이 되었고, 화가들은 그곳에 꿈과 미래, 불안과 공포 같은 것들을 그렸다. 장벽에는 모든 것이 그려졌다. 흑인과 백인, 기린과 용의 날개, 유성과 폭풍우, 세포핵 DNA와 아폴로 같은 것들이 벽마다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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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은 모든 것을 둘로 나눈다. 단순히 공간을 나누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장벽 너머와 이곳 사이의 모든 것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만리장성은 문화와 야만을 나누었고, 크렘린 장벽은 지도자와 백성의 삶을 분리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 독일인뿐 아니라 전 세계가 환호한 것은 자유의 허리를 가르고 있던 가장 큰 장벽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에 많은 화가들이 남긴 그림에서도 이 순간의 환희를 느낄 수 있다. 그들은 그림으로, 글로 그 마음을 표현했다.


"THOUGHTS ARE LIKE TRACES OF BIRDS IN HEAVEN"

"사랑의 운석이 오면 벽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세계가 지금 이대로 있기 원하는 사람은 세계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20160202_160827.jpg 권터 쉐퍼의 <조국>. 독일 국기와 이스라엘 국기를 함께 그렸다. 50번 훼손되고 50번 복원된 작품으로 유명하다.
20160202_163949.jpg 베를린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형제의 키스>
20160202_162656.jpg <세계적인 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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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02_162434.jpg <베를린>

베를린 장벽에 그림을 그린 화가는 모두 118명. 이들은 4196평방미터의 장벽에 4000리터 이상의 물감을 사용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언젠가 DMZ에 우리가 마음껏 들어갈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곳에 화가들은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까. 그림을 그린다면 얼마나 많은 물감이 필요할까. 그곳에는 장벽 대신 철책과 깊은 숲과 인간을 모르는 동물들이 있다. 그곳에 우리는 무엇을 그리고 남길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선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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