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번째 리뷰_폴리티컬 마인드
2007년 7월 2일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TV 토론이 열렸다. CNN에서 중계한 토론회의 진행은 울프 블리처가 맡았다. 울프 블리처는 보수주의자라는 평가를 받는 기자다. 울프 블리처는 후보들을 향해 물었다.
울프 블리처 : 영어가 미국의 공식 언어여야 한다고 믿는다면, 손을 들어주세요.
프레임 이론으로 유명한 미국의 진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이다음에 이어지는 순간을 최근의 정치 관련 TV의 가장 위대한 순간 중 하나로 꼽는다. 울프 블리처의 질문이 끝나자 버락 오바마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오바마는 울프 블리처의 질문 자체를 거부했다.
오바마 : 이것은 정확히 우리를 분열시킬 의도로 제기하는 질문이다. 이미 아시다시피, 당신이 옳다. 만일 이 나라에서 산다면 모든 사람이 영어를 배우려 할 것이다. 쟁점은 미래의 이민자 세대가 영어를 배우려 하는지 여부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합법적이고 양식 있는 이민 정책을 내어놓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그러한 종류의 질문으로 우리가 혼란을 겪게 될 때, 나는 우리가 미국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오바마는 울프 블리처의 질문을 거부함으로써 그의 보수적인 프레임에 갇히지 않았다. 다른 민주당 후보들과 달리 오바마는 자신의 지지 배경을 알고 있었고, 자신이 해야 할 역할도 깨닫고 있었다.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이듬해 오바마는 미국의 대통령이 됐다.
조지 레이코프의 <폴리티컬 마인드>를 읽었다. 저자인 조지 레이코프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 한 권으로 세계적인 석학의 반열에 올랐다. 인지언어학자이자 정치학자이면서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주의자이기도 하다. 조지 레이코프는 오바마가 2008년 대선에서 승리하기 전에 이 책을 구상하고 집필했다. 그는 미국의 진보주의가 왜 보수주의를 이기지 못하는 지를 최신 뇌과학 개념을 빌어 설명한다. 8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지금은 미국의 정치판도가 많이 달라졌다. 오바마는 8년의 재임기간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보냈고, 민주당은 8년 전과는 달리 일방적으로 공화당에 밀리지 않는다. 오히려 트럼프라는 암초를 만난 공화당이 둘로 쪼개질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상황이 달라졌지만 책의 효용성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이 책은 여전히 읽어볼 만하다. 우선은 뇌과학의 관점을 빌어 정치를 설명한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비교적 최근에 들어서야 뇌과학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뇌과학을 정치, 경제, 사회 같은 다른 분야에 접목하려는 시도도 이제 겨우 첫 발을 뗀 수준이다. 조지 레이코프의 책을 찬찬히 읽다 보면 뇌의 기능과 활동이 정치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대략적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사회 변화는 물질적 변화이고, 제도적 변화이며, 정치적 변화이다. 그러나 이 문화전쟁의 주요한 전쟁터는 뇌이다. 특히 의식의 층위 아래에서 뇌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진보주의자는 지금까지 이성에 대한 낡은 견해를 수용했다. 이것은 이성이 의식적이고, 축자적이며, 보편적이고, 감정적이 아니며, 탈신체화되어 있고, 사익에 충실하다는 계몽주의 이성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인지과학과 뇌과학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것은 이성에 대한 그릇된 견해이다.(28p)
유권자들은 자신의 분명한 사익에 반하는 투표를 한다. 즉, 선입견과 편견, 감정에 따라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가치와 우선순위, 목적을 열광적으로 지지한다. 아니 그들은 이유를 의식적으로 알아보지도 않은 채 말없이 자신의 이익과는 무관한 결론에 도달한다. 계몽주의 이성관은 거짓이기 때문에, 계몽주의 이성으로는 실제적인 정치 행위를 설명하지 못한다.(36p)
선거 결과가 나오면 많은 사람이 의문을 가진다. 왜 저소득계층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기득권을 지키려고 하는 보수 정당의 후보가 당선되는가? 왜 고령자는 자신들에게 불리한 정책을 내놓은 정당에 투표하는가? 뇌과학은 이런 질문에 나름의 답을 제시한다. 사람들은 이성에 따라 투표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정치적 판단을 좌우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다. 사람들은 조지 부시가 알코올 중독자에 베트남 참전을 기피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조지 부시가 술을 끊었다는 점에 더 주목한다. 사람들은 조지 부시를 보면서 자신들의 인생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고, 조지 부시에게 표를 던진다. 어려움과 실패를 이겨냈다는 점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다. 조지 부시는 이 '구원' 서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조지 레이코프는 뇌과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선거에서도 이길 수 없다고 말한다.
1차 걸프 전쟁 당시 아버지 부시 대통령도 이 점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부시 대통령은 처음에 사담 후세인이 미국의 생명선인 석유를 차단하고 있다며 전쟁 명분을 설파했다. 하지만 대중은 석유를 위해 피 흘리지 말자는 반전 슬로건에 더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부시 대통령은 자기방어가 아닌 구원 서사를 꺼내 들었다. 사담 후세인이 연약한 쿠웨이트를 괴롭히고 있으니 세계의 경찰인 미국이 나서야 한다는 논리였다. 한 쿠웨이트 외교관의 딸이 야만적인 강간 사건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그녀는 쿠웨이트가 아닌 미국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결국 부시 대통령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다.
조지 레이코프는 "특정한 서사를 수용할 때, 당신은 그 서사와 모순이 되는 실재를 무시하거나 은폐한다. '천진한' 쿠웨이트는 아주 선한 나라가 아니었다. 쿠웨이트는 인권을 심하게 탄압하는 독재정권의 국가였다. 후세인 군대가 사용하는 무기의 근원이 미국이라는 사실도 은폐되었다. 서사는 실재를 은폐하는 데 강력한 효력을 미친다."고 지적한다.
<폴리티컬 마인드>의 두 번째 효용은 미국 정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미국 정치를 이해하는 것은 한국 정치를 이해하는 기반이 된다. 미국과 한국은 많은 부분에서 다르지만, 비슷한 부분도 많다. 강력한 대통령제를 운영한다는 면에서 그렇다. 내각제를 운영하는 국가들과 달리 미국과 한국에서는 대통령 선거에 모든 이목이 집중되고, 정당의 존재 이유도 자기 당에서 대통령을 만드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지 레이코프가 지적하는 미국 정치의 특징들을 보다 보면 한국 정치에 대한 이해도 자연스럽게 넓어진다.
보수적 사고는 진보적 사고와는 아주 다른 도덕적 토대를 지니고 있다. 보수적 사고는 도덕성이 권위에 대한 순종이라는 개념에서 시작한다. 이 경우에 권위는 본래 선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세계의 악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복종 명령을 내리고 악에 대항해 싸우기 위해 힘을 사용할 권리와 의무를 둘 다 지니고 있는 합법적인 권위라고 가정한다. 합법적 권위에 순종하는 데에는 개인적 책임과 절제가 필요하다. 그래서 책임과 절제는 보수의 최고 미덕이다.(102p)
가장 흥미 있는 사례 중 하나는 책무성 개념이다. 진보주의자에게 책무성은 책임 있는 사람이 대중을 위해 떠맡아야 할 책무성을 의미한다. 반면 보수주의자에게는 책무성이 완전히 다르다. 책임 있는 사람들은 도덕적인 권위자이다. 그들은 부하들이 자기를 섬겨야 할 책무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 추문에서는 위계상 최하위 연루자가 처벌을 받았다.(256p)
이 책의 세 번째 효용은 새로운 관점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책 전체를 꿰뚫는 '이성과 합리성에서 벗어나자'는 명제부터 그렇다. 우리는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는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나. 18세기 계몽주의적 이성은 그 한계가 드러났다고 조지 레이코프는 단언한다. 데카르트의 합리주의는 이성에 전지전능한 신분을 부여했지만, 조지 레이코프는 신분증의 유효기간이 끝나버렸다고 말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다시피 사람들은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 사람들은 무의식에 의존해 결정하고,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나 지식은 이유도 없이 무시해버린다. 조지 레이코프가 감정이입과 공감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람은 혼자서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서로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존재다. 진보주의의 핵심 가치인 감정이입의 회복을 위해서라도 선거에서 승리해야 한다고 조지 레이코프는 말한다.
400페이지에 가까운 두꺼운 책을 읽다 보니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오바마의 승리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진보진영의 수많은 선거전략가와 학자들이 저마다 앞선 패배의 원인을 분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을 구상한 결과가 지난 8년의 승리로 이어진 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도 상하원은 엎치락 덮치락 했지만 말이다.
오바마의 승리 방정식을 한국에 적용할 수 있을까?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다. 조지 레이코프는 확신에 차 있지만, 한국에는 적용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예컨대 공기업 민영화에 대한 논의가 그렇다. 한국에는 블랙워터가 없다. 한국의 강력한 정경유착 문화가 공기업 문제에 있어서는 미국과 큰 차이를 낳았다. 큰 틀에서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진보세력이 조지 레이코프가 말하는 정교한 캠페인을 벌일 능력이 있을까? 보수주의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진보주의의 핵심 가치를 바탕으로 프레임을 재정립하는 것이 지금의 한국 진보세력에게 가능한 일일까? 오늘도 포털을 가득 메우고 있는 정치 뉴스를 보고 있자니 한숨만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