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번째 리뷰_채식주의자
소설을 읽는 것만으로 세상이 흔들리는 경우가 있다. 중학생 시절 <상실의 시대>를 처음 읽고 나서가 그랬고, 로맹 가리의 책을 처음 접했을 때가 그랬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비슷한 경험을 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읽는 내내 고통스러웠고, 다 읽고 나서는 악몽에서 깬 듯 온몸이 저려왔다.
어느 늦은 밤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을 걷다 <채식주의자>의 영혜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 순간 익숙한 골목길의 풍경이 생경해졌다. 나무들은 모두 거꾸로 서서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강의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는 세 편의 중단편으로 이뤄져 있다. 주인공 영혜가 고기를 먹지 않게 되면서 생기는 일을 다룬 <채식주의자>, 영혜의 형부인 비디오 아티스트 '나'가 영혜의 몸에 있는 몽고반점에 집착하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 <몽고반점>, 정신병원에 입원한 영혜의 병시중을 하는 언니 인혜의 이야기를 다룬 <나무 불꽃>까지 모두 세 편의 이야기다.
책의 표지는 에곤 실레의 그림 <네 그루의 나무>를 썼다. 한강이 직접 골랐다는 이 그림은 세 그루의 싱싱한 나무와 한 그루의 앙상한 나무를 그리고 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에 고기를 멀리하게 되고, 스스로를 나무와 동일시하게 되는 영혜는 앙상한 나무인 셈이다. 그 옆의 싱싱한 나무들은 영혜를 둘러싼 사람들이다. 영혜의 언니인 인혜, 형부인 비디오 아티스트, 그리고 영혜의 남편까지. 세 편의 이야기는 이 세 사람의 시선으로 서술된다. 영혜는 이 세 사람에게 때로는 불가해한 인물이고, 때로는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고, 때로는 거울 같은 존재로 느껴진다.
세 그루의 나무는 싱싱해 보이지만 이면에는 불안감이 감춰져 있다. 나무들은 뿌리를 공유한다. 같은 땅에서 같은 햇빛과 같은 양분을 공유한 나무인데 어떻게 한 그루만 메말라버릴 수 있을까. 메말라버린 나무는 '아직' 싱싱한 세 그루 나무의 미래를 암시한다.
영혜의 남편이 남모르게 눈길을 줬던 인혜의 모습은 상징적이다. <채식주의자>에서 인혜는 영혜와 달리 생활력 있고 생기 있는 여자로 그려진다. 하지만 <몽고반점>을 거치면서 인혜의 내면 깊숙이 감춰놨던 상처가 드러난다. <나무 불꽃>에서 인혜는 영혜를 병수발하면서 거울을 보듯 자신의 상처를 직시하게 되고, 그 아픔과 고통은 독자에게까지 생생하게 전달된다. 서서히 메말라가는 영혜보다 인혜를 보는 게 더 고통스럽다. 인혜의 상처는 깊숙이 감춰져 있다 갑자기 드러나는 것이므로, 그 낙차를 견디기 어렵다. 고통은 상처의 크기보다 낙차의 깊이에서 나온다.
인혜의 독백은 상투적이면서도 진정성 있다. 인혜의 내면 깊숙이 가려진 상처는 이미 남편인 비디오 아티스트 '나'의 시선에서 예고된 것이다. 그는 인혜에 대해 "당신의 선량함, 안정감, 침착함, 살아간다는 게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아 보이는 태도... 그런 게 감동을 줘."라고 말했다. 인혜의 뒤늦은 후회처럼 이 말에는 사랑이 담겨 있지 않다.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 전의 어린 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도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웃자란 풀들 앞에서 그녀는 단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197p)
문학평론가 허윤진도 해설을 통해 인혜에 대해 주목한다. 허윤진은 "의식의 퓨즈가 나가는 편이 덜 고통스러운가, 의식의 퓨즈를 잇는 편이 덜 고통스러운가. 소설은 의식의 퓨즈가 서서히 끊어지는 이를 중심으로 진행된다고 읽힐 수도 있지만, 의식의 퓨즈를 끊고 싶어도 이을 수밖에 없었던 이를 중심으로 지체된다고 읽힐 수도 있다."고 말한다.
영혜는 육식을 거부한다. 영혜가 거부한 육식은 폭력성, 그 자체다. 한강은 "영혜가 끝내 육식을 거부한 것은 육식으로 상징되는 폭력성이 제 몸에 깃드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영혜의 꿈은 육식의 폭력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난 무서웠어. 아직 내 옷에 피가 묻어 있었어. 아무도 날 보지 못한 사이 나무 뒤에 웅크려 숨었어. 내 손에 피가 묻어 있었어. 내 입에 피가 묻어 있었어. 그 헛간에서, 나는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주워먹었거든. 내 잇몸과 입천장에 물컹한 날고기를 문질러 붉은 피를 발랐거든. 헛간 바닥, 피웅덩이에 비친 내 눈이 번쩍였어.(19p)
영혜가 육식을 거부하게 된 것은 자신의 오랜 상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다리를 문 개를 아버지가 잔인하게 죽였던 어린 시절의 기억. 그 트라우마가 서서히 영혜를 잠식했고, 결국 영혜는 어느 순간 의식의 퓨즈를 끊게 됐다.
영혜는 채식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육식을 거부한다. 육식이 아니면 남는 것은 아사와 채식뿐이므로 영혜의 선택지는 채식일 수밖에 없다. 채식주의자라는 제목은 모순적이다. 영혜는 채식주의를 선언한 적이 없다. 그러나 영혜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가 채식주의였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현상에 '주의'를 붙여 이해하기 쉽게 만든다. 사람들이 영혜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영혜에게 채식주의라는 잘못된 꼬리표를 붙였기 때문이다. 영혜는 채식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육식을 거부한 것이다.
작가는 영혜의 상처를 끝까지 봉합하지 않는다. 작가 스스로 고통의 3부작이라고 불렀듯이 상처가 벌어지고 덧나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작가마저도 소설을 쓰며 한 시간마다 울어야 했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고통의 끝에서 영혜는 나무가 된다. 더 이상 채식마저도 필요하지 않은 지점에 도달한 것이다. 나무는 물과 빛만 있으면 되기에 영혜에게 음식은 필요하지 않다.
이상은 '나는 인간만은 식물이라고 생각한다'고 자신의 습작 노트에 썼다. 이상의 글귀는 많은 작가에게 인간의 식물성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한강도 이상의 글에서 <채식주의자>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상과 한강이 함께 본 것은 인간이 끝내 다다를 수 없는 지평선 너머의 공간인 것 같다. 영혜는 스스로 나무가 되었다고 여기지만, 구급차에 실린 채 대형병원으로 향할 뿐이다. 영혜처럼 한계 너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의식의 퓨즈를 끊어야만 한다. 우리는 그런 이들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식물이 된 인간은 인간적인 한계를 뛰어넘었기에 인간이 아닌 셈이다.
영혜의 트라우마는 아버지에게서 기인한다. 아버지는 영혜를 어릴 때부터 때렸고, 영혜를 문 개를 잔인하게 죽였다. 이 엇갈린 부정(父情)은 영혜에게 폭력성이라는 단일한 기억으로 각인됐다.
영혜는 육식을 거부하고 종국에는 먹는 것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어린아이처럼 변해간다. 작고 마른 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아이의 몸으로 돌아간 영혜는 그래서 아이들만이 볼 수 있는 세상의 진실을 목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천사들을 볼 수 있는 존재는 아이들 뿐이었다.
<채식주의자>는 읽는 것을 견뎌야 하는 책이다. 그만큼 고통스럽고 쓰라린 책이다. 영혜를 지켜보는 인물들이 저마다의 상처를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독자도 비슷한 경험을 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책을 다 읽고 나면 한줄기 빛을 발견하게 된다. 아주 깜깜한 어둠 속이지만, 어딘가에서 빛이 보이는 것 같은. 식물은 빛을 향해 자란다. 빛이 없을 때도 빛을 향해 있다. 그래서 식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빛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다. 희망은 그런 것이 아닐까.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를 짐작할 수 있는. 식물의 향일성(向日性) 같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