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한강의 시집에 밑줄을 그어-

55번째 리뷰_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by 이기자

이천오년 오월 삼십일, 제주의 봄바다는 햇빛이 반. 물고기 비늘 같은 바람은 소금기를 힘차게 내 몸에 끼얹으며, 이제부터 네 삶은 덤이라고


어린 새가 날아가는 걸 보았다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그의 죽음과 내 출생 사이에 그어진

9개월여의 시간을

다만

가끔 생각한다


나는 아직 심장도 뛰지 않는

점 하나로

언어를 모르고

빛도 모르고

눈물도 모르며

연붉은 자궁속에

맺혀 있었을 것이다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


나쁜 꿈에서 깨어나면

또 한 겹 나쁜 꿈이 기다리던 시절


어떤 꿈은 양심처럼

무슨 숙제처럼

명치 끝에 걸려 있었다


단 한 군데도 직선을 숨겨놓지 못한

사람의 몸의 부드러움과


꼭 한 번

완전하게 찾아올

중력의 직선을 생각하는 나는


신도

인간도 믿지 않는

네 침묵을 기억하는 나는


그해 늦봄 나무들마다 날리는 것은 꽃가루가 아니었다

부서져 꽂히는 희망의 파편들


죽은 나무라고 의심했던

검은 나무가 무성해지는 걸 지켜보았다


지켜보는 동안 저녁이 오고


연둣빛 눈들에서 피가 흐르고

어둠에 혀가 잠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