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투성이 사피엔스에게 돌을 던지다

56번째 리뷰_사피엔스

by 이기자

<사피엔스>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 대신 우리가 애써 외면한 진실이 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모순의 역사를 다룬다. 원자폭탄을 만든 핵물리학자가 노벨평화상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피엔스의 역사는 모순투성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관용을 설파하는 기독교인이 다른 기독교인을 학살했고, 어쩌면 사피엔스의 역사 자체가 다른 호모족을 학살하면서 시작된 것일 수도 있다. 애초에 우리는 학살자의 피를 안고 태어났으니 원죄의식을 가져야 하는 게 당연할 수 있다. 인류에게 불필요한 동물들을 거의 멸절시킨 사피엔스들이 국제적인 시민단체를 만들어 환경보호와 멸종위기 동물 보호에 나선다는 사실도 아이러니하다.


유발 하라리는 이 모든 역사를 담담하게 기술했다. <사피엔스>에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은 비유나 은유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다. 사실 <사피엔스>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과학이나 역사에 관심이 있거나 최소한 최신 뉴스를 꾸준히 접해온 사람들이라면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의 모음일 수 있다. 사피엔스의 진로를 결정한 세 가지 큰 혁명들, 인지혁명과 농업혁명, 산업혁명에 대한 이야기는 세계사 교과서에서도 나오는 이야기들이고, 최신 과학기술이 사피엔스를 넘어서는 새로운 종의 출현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미셸 우엘벡의 소설 <소립자>를 연상시키는 결론이기도 하다.


다소 뻔한 이야기들인데도 이 책은 흡입력이 대단하다. 개인적으로 두 가지 이유 덕분이라고 본다. 우선은 유발 하라리의 통찰력 있는 문장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빅 히스토리나 빅 퀘스천보다 책의 군데군데 자리한 유발 하라리의 작은 통찰력이 더 빛난다. 읽으면서 그 깊이에 감탄한 부분들을 발췌해봤다.

인간은 권력을 획득하는 데는 매우 능하지만 권력을 행복으로 전환하는 데는 그리 능하지 못하다는 것이다.(10p)
몇만 년 전의 지구에는 적어도 여섯 종의 인간이 살고 있었다. 여기에서 이상한 점은 옛날에 여러 종이 살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딱 한 종만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이 사실은 우리 종의 범죄를 암시하는 것일지 모른다.(26p)
우리의 언어가 진화한 것은 세상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수단으로서였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전달할 가장 중요한 정보가 사자나 들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인간의 언어가 진화한 것은 소문을 이야기하고 수다를 떨기 위해서라는 것이다.(46p)
우리 조상들이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았다는 급진적 환경보호 운동가의 말은 믿지 마라. 산업혁명 훨씬 이전부터 호모 사피엔스는 모든 생물들을 아울러 가장 많은 동물과 식물을 멸종으로 몰아넣은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생물학의 연대기에서 단연코 가장 치명적인 종이라는 불명예를 갖고 있다.(117p)
범인은 한 줌의 식물 종, 밀과 쌀과 감자였다. 이들 식물이 호모 사피엔스를 길들였지, 호모 사피엔스가 이들을 길들인 게 아니었다(124p)
볼테르는 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하인에게 그 이야기를 하지는 마라. 그가 밤에 날 죽일지 모르니까."(166p)
'자연은 가능하게 하고 문화는 금지한다'는 기준이다. 생물학은 매우 폭넓은 가능성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사람들에게 어떤 가능성을 실현하도록 강제하고 다른 가능성을 금지하는 장본인은 바로 문화다.(216p)
지구화의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이른바 '민속' 요리다. 우리는 이탈리아 식당에서는 토마토소스를 넣은 스파게티를 예상하고, 폴란드와 아일랜드 식당에서는 많은 감자를, 아르헨티나 식당에선 수십 종의 스테이크 중 하나를 고를 것을, 인도 식당에선 거의 모든 음식에 매운 고추가 들어갈 것을, 모든 스위스 카페의 하이라이트는 크림을 잔뜩 넣은 뜨겁고 진한 코코아일 것을 예상한다. 하지만 이 중 어떤 음식도 이들 국가가 원산지는 아니다. 토마토, 고추, 코코아의 원산지는 멕시코다.(244p)
3세기에 걸친 모든 박해의 희생자를 다 합친다 해도, 다신교를 믿는 로마인들이 살해한 기독교인은 몇천 명을 넘지 않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후 1500년간 기독교인은 사랑과 관용의 종교에 대한 조금 다른 해석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기독교인 수백만 명을 학살했다.(중략)
1572년 8월 24일, 선행을 강조하는 프랑스 가톨릭교도들은 하나님의 인간 사랑을 강조하는 프랑스 개신교 공동체를 공격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로 불리는 이 공격에서 5천~1만 명의 개신교도가 살해되는 데는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이 하루 동안 기독교인이 살해한 기독교인은 다신교를 믿는 로마제국이 제국의 존속 기간을 통틀어 살해한 기독교인의 숫자보다 많았다.(306~308p)
1459년의 세계지도는 대륙과 섬과 상세한 설명으로 가득 차 있었던 데 반해 살비아티의 세계지도(1525년)는 거의 공백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연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눈을 돌리면 어느덧 빈 공간과 만난다. "이 지점 너머에는 뭐가 있지?" 지도는 답을 주지 않는다. 보는 사람에게 닻을 올리고 찾아보라고 요구할 뿐.(409p)
기독교나 나치즘 같은 종교는 불타는 증오심 때문에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 자본주의는 차가운 무관심과 탐욕 때문에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468p)
산업혁명의 핵심은 에너지 전환의 혁명이었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에는 한계가 없다는 사실을 산업혁명은 되풀이해서 보여주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유일한 한계는 우리의 무지뿐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분명 세상에는 에너지 결핍이 존재하지 않는다. 부족한 것은 에너지를 찾아내 그것을 우리의 필요에 맞게 전환하는 데 필요한 지식이다.(480p)
대서양 노예무역이 아프리카인을 향한 증오의 결과가 아니었던 것처럼, 현대의 동물산업도 악의를 기반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그 연료는 무관심이다. 달걀과 우유와 고기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짬을 내어 자기가 살이나 그 산물을 먹고 있는 닭과 암소, 돼지를 생각하는 일이 드물다.(486p)
미국 사람들이 해마다 다이어트를 위해 소비하는 돈은 나머지 세상의 배고픈 사람 모두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액수다. 비만은 소비지상주의의 이중 승리다. 사람들은 너무 많이 먹고(적게 먹으면 경제가 위축될 테니) 다이어트 제품을 산다. 경제성장에 이중으로 기여하는 것이다.(493p)
모든 평화상을 종식시킬 노벨 평화상은 원자폭탄을 개발한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그의 동료들에게 주어졌어야 할 것이다. 핵무기는 초강대국 사이의 전쟁을 집단 자살로 바꾸어놓았으며, 군대의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시도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526p)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길가메시의 어깨에 목말을 타고 있다. 길가메시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프랑켄슈타인을 막는 것도 불가능하다.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이들이 가고 있는 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58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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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의 통찰력은 사피엔스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향한다. 이 모순투성이 존재는 스스로 세상을 파멸시키고 있으면서도 세상을 구하겠다고 발버둥 치고 있다. 우리들 한 명 한 명은 너무나 작고 미천한 존재여서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망가뜨리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샴푸로 샤워하고 차를 타고 회사에 나가고 점심을 먹는다. 점심식사에 올라오는 메뉴들은 우리의 무관심 덕분에 폭발적으로 성장한 동물산업의 결과물들이다. 이런 하루하루가 이 세상을 어떻게 망가뜨리고 있는지 우리는 깨닫지 못한다. 지구가 병들어간다는 말은 TV 속 구호일 뿐이지, 내가 앉아 있는 스타벅스 창 밖의 나무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푸르다. 하지만 지구는, 이 세상의 생태계는 확실히 망가지고 있다.


<사피엔스>를 읽으면 잠시 잊고 있던 큰 그림을 보게 된다. 사람들이 <사피엔스>를 계속해서 찾는 두 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치여 방 안 구석 어딘가에 던져놨던 만물의 영장으로서 가져야 할 의무를 떠올리게 된다. 유발 하라리가 이 책을 쓴 것도 정확히 이런 의도에서라고 생각한다.


길가메시의 어깨에 목말을 타고 있는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길가메시의 발뒤꿈치에도 못 미치는 평범한 인간이 아닌가. 그럼에도 유발 하라리는 우리가 최소한 이들이 나아가는 방향에는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지만, 책을 읽는 다른 누군가는 믿을 것이다. 혹시 아는가. 믿음을 가진 사람 중에 누군가가 정말로 그 일을 해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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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그레이_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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