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반감기는 영원이다

57번째 리뷰_이렇게 그녀를 잃었다

by 이기자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는 그녀를 잃은 그의 이야기인 동시에 그가 잃은 그녀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과 이별을 다룬 9편의 단편소설은 '그'의 입장에서 서술된다. 그러나 '그녀'들은 그 못지않게 사랑에 절박하고 끈기 있고 삶을 지켜나간다. 대상화되지 않는 그녀들의 삶을 지켜보는 것이 더 흥미진진할 정도다.


주노 디아스는 이제 이름만으로도 책을 집어 들게 만드는 작가다. 오스카 와오의 놀라운 삶, 책의 제목만큼이나 놀라웠던 그의 첫 장편 소설을 기억한다면 이 단편집을 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도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처럼 주노 디아스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미국에서 살아가는 도미니카인들의 일상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그들의 단어와 문장으로 생생하게 전달된다.

한국인으로서 이 책에 나오는 도미니카인들의 사랑은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아버지의 날을 '개의 날'이라고도 부르는 도미니카다. 사랑과 연애에 대한 보수적인 통념이 자리 잡은 한국에서 이 소설의 사랑은 이국적으로만 느껴진다.


여기에 생생함을 더해주는 건 그녀들이다. '푸라 원칙'의 푸라는 암에 걸려 죽어가는 남자와 억지로 결혼하고 그의 '시민권자 정자'에 자신의 운명을 건다. '오트라비다, 오트라베스'의 야스민은 병원의 환자복을 세탁하면서 살아간다. 그녀는 고국에 가족을 놓고 온 남자와 사랑을 한다. 아주 담담한 사랑이다. 그리고 그 남자는 다른 단편 '겨울'에서 야스민이 아닌 자신의 가족들과 미국에 있다. 아주 추운 겨울 미국에 도착한 그의 가족은 고국을 그리워한다. 그의 아내는 눈발이 날리는 웨스트민스터 대로 꼭대기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운다. '미스 로라'의 미스 로라는 어떤가. '바람둥이의 사랑 지침서'에 나오는 엑스와 하버드 법대생은 또 어떤가. 그녀들은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바꿔 말하면 생활력일 수도 있다. 그녀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도 포기하지 않는다.


주노 디아스는 언론 인터뷰에서 "나는 내가 속한 사람들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내 사람들 '에게' 글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는 주노 디아스의 사람들, 그들의 사랑과 삶에 대한 일종의 보고서다. 주노 디아스가 현미경을 들이댄 어느 순간의 처절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전달한 보고서다.


이별을 다룬 여느 책들과 달리 이 책은 이별이나 사랑을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고, 그렇다고 그런 것들이 아무 의미 없는 것에 불과하다고 폄훼하지도 않는다. 사랑은 그저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책의 첫머리에는 멕시코 작가인 산드라 시스네로스의 글이 나온다.

맞아, 우리는 노력하지 않았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모든 추억이 다 좋지는 않았어.
하지만 이따금 좋았던 때도 있었지.
사랑은 좋았어. 나는 곁에서 삐딱하게 누워 자는
너의 잠을 사랑했고 무서운 꿈을 꾼 적이 없었어.

우리의 것처럼 대단한 전쟁에는 별이 있어야 마땅하지.

문장들


나는,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나와 마그다가 처음 이야기를 나누던 추억뿐이다. 러트거스에 다닐 때였다. 우리는 조지 스트리트에서 E 버스를 함께 기다렸고, 그녀는 보라색을 입었다. 온갖 보랏빛을.

그때 나는 끝났다는 걸 알았다. 처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때가 바로 끝이다.

43p 해와 달과 별들


내 머리카락을 자기 얼굴에 덮고 자곤 했어. 그러면 안전한 기분이 든다고 했어.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그녀는 빨래를 차곡차곡 다 개어 쌓았고 나는 문을 열어 붙잡아준다.

64p 닐다


아나 이리스는 섬에 아이들을 두고 왔고, 거의 칠 년이나 세 아들을 보지 못했다. 우리의 긴 여행에서 무엇이 희생되어야 하는지 그녀는 이해하고 있다.

82p 오트라비다, 오트라베스


미스 로라가 널 만지자 넌 별안간 위를 올려다보았고 그녀의 마른 얼굴에서 눈이 얼마나 큰지, 속눈썹은 얼마나 긴지, 한쪽 눈의 홍채가 다른 눈에 비해 얼마나 더 진한 청동빛인지가 눈에 들어왔다.

206p 미스 로라


어머니는 전혀 눈치를 못 챘다. 옛날에는 뭐든 다 알았다. 캄페시노(시골사람)다운 레이더가 있었다. 이제 어머니는 마음이 다른 데 가 있었다. 슬픔, 슬픔에 대처하는 데 시간을 다 할애하고 있다.

221p 미스 로라


너는 옛 속담을 생각한다. 내게 아름다운 여인을 보여줘, 그러면 그 여자와 붙어먹는 게 지겨운 사람을 보여주지. 하지만 너는 아무리 해도 그녀가 지겹지는 않을 것 같다.

261p 바람둥이의 사랑 지침서


너는 네가 아는 모두에게 물어본다. 잊는 데 보통 얼마나 걸려?

공식은 여러 가지다. 사귄 햇수 곱하기 일 년. 사귄 햇수 곱하기 이 년. 그냥 의지력 문제다. 끝났다고 네가 결정하는 날 끝나는 거지. 절대 잊히지 않아.

280p 바람둥이의 사랑 지침서



매거진의 이전글모순투성이 사피엔스에게 돌을 던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