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우울증 낫는 약도 처방해 주시나요?"
2018년 1월 겨울에 첫째를 출산하고 2주 후 산후 정기 진료 때 나는 절박한 마음으로 이 질문을 했다.
" 산후 초반에 그럴 수 있어요. 혹시 더 심해지면 다시 내원해 주세요."
약간 건조하게 반응하는 의사 선생님의 짧은 대답은 역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모든 게 처음이었고, 첫 출산은 정말 어떤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우리 만치 지난하고 순간순간이 고통스러웠고, 그 과정에서 나는 철저하게 아무런 힘도 없는 존재 같았고 그 무능력함은 출산 이후 본격적인 육아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것만 같았고, 그리고 40이 다 되어 호되게 치러낸 엄마 되기의 첫 과정으로 온몸의 호르몬은 하늘에서 땅을 오르내리느라 이미 나의 몸과 마음은 내 것이 아닌 것 같았고.
그 수많은 " 같았고"의 이유들이 나름대로 정당했고 근거도 분명했기에
초반에는 점점 이상해져 가는 나를 위로하기가 쉬웠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그런 여러 이유를 들어가며 이해해 주고자 애썼다.
그러나 그 처음이 한 달이 되어가고 두 달, 석 달로 길어지면서
이미 "우울증"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몸은 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갔으나
나는 정작 "아기"를 사랑할 수가 없었다.
아니 너무 "사랑"하고 "사랑"해야 하는 대상이 갑자기 이 세상이 떡 하고 나타나는 바람에
나 자신조차 아직 가늠이 되지 않았던 나는 그 대상이 실존하는 현실 같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아기"는 울고 또 울고 안아주지 않으면 잠들기를 거부하며 같이 밤을 지새우자고 또 울었다.
책으로 영상으로 아기 키우기를 학습한 나는 아기를 안고 어르다 살짝 잠이 드는 것 같으면 냉큼 아기를 내려놓았다. 그러면 아기는 언제 자기가 눈을 감았느냐며 깨어나 다시 울었다.
갑자기 그렇게 "아기"는 나와 나의 삶 전체를 갈아엎고 좌지우지했고 나는 마치 물살에 휩쓸려 가는 바싹 마른 나뭇잎처럼 작은 아기의 몸짓 하나에 여기로 저기로 휩쓸려 다니는 듯했다.
점점 나는 아기를 직접 안을 수가 없었고 남편이나 친정 엄마품에 안긴 채 어깨 너머로 나를 바라보는 아기의 눈빛을 되받으며 속으로 말했다.
"나, 너 싫어. 너 때문에 내 인생이 이제 완전히 갇혀버렸어..."
(지금도 그렇게 차갑게 바라보며 마음 속 말이었을지언정 그런 마음을 품었다는 것에 첫째에게 미안하다...)
아기와 도저히 한 공간에 있을 수가 없어서 밤에는 친정엄마가 아기 옆에 주무시고 나는 옆방으로 나왔다.
심지어 그 조차도 힘들어 진지하게 원룸을 구해서 나가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어떤 이성적인 생각이나 판단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우울증은 정상적인 사고를 점점 마비시켰다. 오로지 이 아기로 인해 내가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이 아기라는 존재에게서 멀어지는 방법만 고민했다.
남편과 친정엄마는 이제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었으니 밖에 나가 산책이라도 하면 나아질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봄이 되면서 집 밖을 나와 걸었다.
걷는 내내 했던 생각은 이제 20여분 후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아기가 있는 저 집에 절대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을 반복했다.
상담센터에 전화를 걸어 산후우울증이라고 하니 예약이 많이 밀려있다며 한 달 후 정도에 상담이 가능하다고 했다. 일단 예약을 잡아두었다.
아기와 함께 있을 수 없어서 결국 출산휴가가 끝나고 바로 복직을 했다.
교무실에 앉아있으면 "우울"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나를 집어삼켰다.
주변과 나는 분리되어 나만 통유리 감옥에 갇혀서 우울과 불안 두려움에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그 파도에 질식할 것 같은 순간이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왔다.
교무실을 뛰쳐나와 부랴 부랴 남편에게, 언니에게, 엄마에게 나의 증상을 알고 있는 그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나 너무 무섭고 두렵고 겁난다"라고 두서없이 내뱉었다. 그들은 그저 들어주었다.
그렇게 다시 거친 물살 위로 다시 머리를 들어 올리고 그 다음 수업을 들어갔다.
우울증의 우울과 두려움은 평상시 우리가 흔히 알고 느끼는 감정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감정이라기보다는 무슨 살아있는 생명체 같았다.
자고 일어나면 그 "우울" " 두려움"은 네 발로 기어서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와서 나를 통째로 집어삼켜버렸다. 그러면 그 안에서 나는 아무것도 못한 채 그 보이지 않는 "괴물"이 시키는 대로 괴로워했다.
눈뜨는 게 무서웠다. 그 괴물의 실체는 나라는 존재만큼 생생하고 분명했다.
분명 살아서 나를 삼켰고 그 고문은 매일 반복되었다.
"아기"가 아니라 그 산후우울증이 나를 서서히 죽이고 있었다.
마음먹고 병원을 가기로 했다. 기본적인 삶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약을 처방받기로 했다.
이런 류의 증상에 전혀 무지했던 우리 가족은 나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고 나름의 방법으로 대처하고 돕기 위해 노력했지만 친정엄마는 나의 모습에 자주 우셨다.
그 울음에도 나는 미안하다는 마음도 못 느낄 만큼 굳어있었다.
기독교인이 되고 가장 중요하게 여겨 온 주일예배도 갈 수가 없었다. 앉아있으면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고 다만 아기가 없는 혹은 자식을 다 키운 여자 집사님들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친정엄마의 눈물 어린 호소로 나는 꾸역꾸역 예배를 나갔다. 몸만 의자에 간신히 둔 채 그렇게 1시간을 견디고 돌아왔다.
때때로 "기도"를 했다. 아니 기도라기보다는 고통받는 짐슴의 울부짖음이나 포효라고 보는 게 맞겠다.
나는 차 안에서 울부짖었다. 빈 방에서 몸부림쳤다.
"살려주세요... 이렇게는 못살겠어요... 살려주세요..."
어느 날 목사님 내외분이 심방을 오셨다.
온화하고 자상하신 목사님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내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시더니 말씀하셨다.
"자매님. 힘들 때 이렇게 말해보세요.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성령님 인정합니다."
살기가 싫은데 뭐가 감사고 사랑인가...
하지만 돌을 씹어 삼키는 심정으로 가장 힘들 때 꾸역꾸역 그 말을 되뇌었다.
집중이 안되어 기도를 할 수 없었기에
기도 대신에 그 말을 한 자 한 자 힘겹게 내뱉었다.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그래도 했다. 다른 길이 없었기에. 상담도 병원도 예약이 밀려 기댜려야 해서 그때까지 해보기로 했다.
일요일이면 교회를 가서 1시간을 견뎠다.
미칠 듯이 우울과 두려움이 콤보로 나를 쳐댈 때면 사력을 다해 한 마디씩 말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성령님 인정합니다.
그리고 4월이 가고 5월이 가고 6월이 가고 있었다.
6월 말.
그날도 일요일 주일이었다.
간신히 1시간 예배를 견디고 돌아와 너무 진을 뺀 나머지
잠든 아기 옆에 누워 나도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오후 햇살이 길게 방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아기는 여전히 새근새근 잠들어있었다.
나는 예의 그 "우울증" 괴물을 기다렸다.
그 괴물이 축축하게 질퍽거리는 네 발로 걸어와 음흉하게 웃으며 나를 집어삼키고 시작될 고문을 예상했다.
1초, 2초.... 5분... 10분...
이상하다. 그 괴물은 어디로 간 걸까? 아직 안 온건 가? 더 기다려보자. 20분 30분...
정말 이상하다... 괴물은 오지 않았다.
그저 그 방에는 평화롭게 자고 있는 아기와 잘 자고 일어난 엄마와 따뜻한 햇살과 그림자만 있을 뿐이었다.
괴물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그날은 내가 첫째를 출산 후 처음으로 맞이한 조용하고 평화로운 일요일 오후였다.
아마 그날, 그 방에는 나와 아기 그리고 나를 살리신 "그 분"이 계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