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라이프의 이점은 참으로 많다.
가시적인 효과부터 내적인 유익까지 알차게 좋은 장점들을 지니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발전할 가능성을 지닌 탁월한 생활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청소하기가 쉬워지고 먼지가 덜 쌓이는 쾌적한 집 내부의 환경은 가시적인 효과일 것이다.
줄어든 청소시간만큼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는 것은 또 어떤가.
물건을 찾기 쉬워지고 쌓여있는 수납장을 잘못 열다 물건이 떨어지는 불상사를 피할 수도 있으니 거듭 좋다.
하지만 이러한 가시적인 이득은 실제 미니멀라이프가 가지고 온 내면의 변화에 비하면 그 중요도에서 뒤로 밀려난다. 적어도 나에게는 내면의 변화가 더욱 큰 유익이었다.
내가 그토록 급하게 몰아치듯 미니멀 라이프라는 생활방식을 쫒기 시작했던 가장 큰 이유는 무기력감이었다.
육아휴직 3년 후 복직을 했을 때 처음에는 적응하느라 하루하루가 바빠서 내 마음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워킹맘의 고충에 대해서 익히 듣고 읽기도 했지만 역시 사람은 경험의 크기가 자신의 내면의 그릇의 크기인 것 같다. 막상 나의 상황이 되어보니 매일매일이 언제나 쓸려 다니는 기분이었다. 이미 큰 흐름을 가지고 있는 파도에 떠밀려 스스로는 방향전환도 속도 조절도 할 수 없는 나무조각 같은 느낌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직장에서는 시스템과 이미 자리 잡은 분위기에 나를 끼워 맞추어야 했고 시간에 따라 있으라고 한 그곳에서 하라고 주어진 일을 해야 했다. 그리고 꾸역꾸역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하루 동안 정리가 안된 집과 엄마를 연창 하는 아들들이 한 다리에 하나씩 매달렸다.
가장 큰 원인은 피곤이었을 것이다. 몸도 마음도 쉬지 못한 채 날이 서있다 보니 모든 상황은 나에게 짐이었다. 그러나 그 짐을 덜어낼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쉬고 싶은데 쉴 수가 없었고 나오고 싶은데 나올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방향을 잘못 잡은 생각은 처음에는 작게 시작하여 점점 크게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왜 나만 이렇게 고생해야 하는데"
"내가 그만두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먹고살지"
"다 때려치우고 일단 저축한 돈으로 지내보자. 그러면 뭐가 돼도 되겠지"
"내가 그만둔다고 하면 다들 정신 나간 사람 취급하겠지"
이런 대화들을 내 안에서 나 혼자만 반복하다 보니 점점 나만 피해자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가해자가 되어버렸다. 대책 없이 아무렇게나 살아버리고 싶은 충동들은 또 얼마나 강하던지. 하루에도 몇 번이나 속으로 퇴직을 외쳤다.(물론 지금도 퇴직은 계속 생각 중이다. 그러나 좀 더 템포를 천천히 늦추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혼자 비뚤어지고 왜곡되어서 나도 모르는 방향으로 비척비척 걸어가던 나에게 미니멀 라이프는 오랜만에 내 삶에 무기력감을 조금씩 걷으며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슨 큰 변화가 아니었다. 내 그릇만큼, 실제 내가 내딛을 수 있는 보폭만큼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건 내 집안에 어떤 물건이 있고 그 물건들이 나에게 필요한지 아닌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다 정해져 있고 다 시키는 일만 하고 살아야 되는 줄 알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직장을 그만두거나 직업을 바꾸는 선택지는 없다고 여겼다. 그냥 참고 견디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여겼다.
아이들 곁에 있고 싶지만 막상 퇴근하여 아이들을 만나면 피곤에 겨워 짜증을 내는 엄마의 모습만이 나의 전부라고 여겼다.
내 집, 내 살림이지만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이 물건에, 다른 사람의 손에 다 맡긴 채 퇴근후면 낯선 사람의 공간에 들어서는 듯 느껴지던 이질감과 불편함을 그저 넘기는 것만이 답인 줄 알았다.
그런데 물건을 옮겨도, 심지어 버려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내 안에 스스로 선택하니 실제 눈앞에 보이는 변화가 있었고 이는 내가 원래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행할 수 있는 존재라는 자신감을 회복시켜 주었다
너무 눌려있었기에 옷 한 벌 버리고 비어진 옷장 안의 공간만으로도 뭔가 다른 공기를 쉬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