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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는 지금 Jan 14. 2024

감기약이 가져다준 선물

감기약을 손바닥 위에 놓고 가만히 내려다본다.

큰 알. 중간알. 손가락  사이로 금세 또르르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작은 알. 반으로 쪼개져 울퉁불퉁한 반달도 있다.


어릴 적 감기약은 노란 갱지에 들어있었다. 갱지를 살살 펼치면 하얀 가루약이 부드럽게 내린 고운 눈가루처럼 옴 쿵 하게 모여있었다. 어른숟가락에 그 약을 살살 얹어서 물에 뭉개어 한번에 꿀꺽 삼키는 게 주된 일이었는데 자칫 기침이 나온다거나 물만 삼키거나 해서 진작 먹어야 할 감기약이 혀 위에 그대로 남기라도 하면 그 맛에 한참 입안이 썼다. 쓰다고 호들갑을 떨면 엄마는 입안에 알사탕 하나를 넣어주시곤 했다. 그 맛에 일부러 물만 삼킨 적도 있었는데 아마 엄마는 알고도 기꺼이 사탕을 주시곤 하셨을 테다.


감기약을 먹고 나면 몸이 착 가라앉는다. 마치 전속력을 다해 고속도로 위를 달리던 자동차가 점점 속도를 줄여가듯 온몸의 세포가 조금씩 활동의 속도를 늦추고 템포를 천천히 조율해 가는 것 같다.


몸이 가라앉으면 마음도 기분도 같이 잠잠해진다. 어떤 우울감이나 낙심이 들어 처지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이 가만히 휴식을 취하기 시작하니 마음도 같이 그 옆에서 부산함을 내려놓고 쉴 준비를 하는 듯하다.


감기약을 먹고 오한이 잠잠해져서 그간 미뤄둔 집안일을 좀 하는데 예전 같으면 짜증이 나서 목소리가 올라가고 잔소리가 나올법한 상황에서도 덤덤한 나 자신을 보게 된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간 내 몸이 얼마나 긴장한 채로 곤두서서 지내왔는지를.

온몸 전체가 주변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내키는 대로 얼마나 공격적으로 대처해 왔는지를.

한껏 방어벽을 세우고 여기서 실수하면 큰일이라도 날듯 날 선 상태로 지내왔음을.


그렇게 곤두선 바늘 같았던 내 몸이 감기약을 먹고 흐물흐물 풀린 것이다. 인위적인 방법이긴 했지만 나에게는 이렇게나마 무거운 긴장이 떨어져 나간 게 오히려 좋았다.


 몸이 쉬어도 된다고 허락해 주는 것 같았다.

그래 내가 다 안 해도 되는구나

내가 안 해도 큰일 안 나는구나

나 그냥 먹고 자고 뒹굴어도 되는구나.


그래서 감기약 먹는 게 오히려 지금은 기다려지기도 한다.

다 나으면 또 일을 해야 되고 무거운 결정과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는데 감기약을 입에 털어 넣는 순간 그 숙제들은 잠시 다 뒤로 물러난다.


착 가라앉은 몸은 혼자 세상짐 다 진 듯 심각해진 마음을 옆에 앉히고 토닥토닥 다독인다.


"어이. 친구. 지금 나는 쉴 거야. 자네도 쉬어. 내가 회복되면 자네가 지금 짐이요 숙제로 여기고 갖은 인상 쓰고 있는 그 일들이 사실 신나는 소풍준비 같은 거란 걸 알게 해 줄게. 그러니 지금은 자네도 푹 쉬어."


나는 긴장이 많다. 겁이 많은 어설픈 완벽주의성향이라 고달플 때도 많다. 예전 수영 배울 때 강사분이 자꾸만 나보고 몸에 힘을 빼라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 힘을 뺄 수 있는지를 사실 지금도 모르겠다.


서글프게도 아프고 나서야 감기약을 통해 내 몸에 쉼을 허락하는 중이다.


감기약이 아닌 내 몸과 마음이 서로 잘 통해서 일만큼 쉼을 스스로에게 허락하며 살고 싶다.


지금 꼭 이렇게가 아니면 또 어떠랴.


내 몸에 힘을 살짝 빼고 나사를 조금 덜 조여도

내 인생은 잘 굴러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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