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성격유형은 기억이 안나지만 한 가지 유의미하게 다가왔던 것은 '창조적인 활동을 즐긴다'라는 분석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살아온 삶의 여정이나 하고 있는 일도 창조적인 것보다는 주로 반복적으로 성실히 해야하는 일로 많은 부분 채워져있음에도 그 분석이 마음에 크게 와 닿았던 것은 아마도 실제 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내 마음 한 진심에서는 그것을 많이 원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튼, 나만의 색깔이 빛나는 창조적인 능력과는 결이 다르게 느껴지는 매일의 정리는 내가 잘하는 분야는 아니라고 늘 여겨왔다.
초반에 수많은 미니멀 라이프 관련 책에서 소개하는 수납법, 정리법 등등을 실천해보고자 호기롭게 시도는 해보았지만 얼마 안가 포기했다. "How To"가 세분화가 많이 되어 단계가 많을 수록 읽는 것만으로도 피곤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나의 미니멀 라이프는 정리보다는 비우기로 기울어졌다. 정리를 잘 못하니 물건의 개수 자체를 줄이는 것이 깔끔해지는 현실적인 길이었다.
그러나 가족 네 명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집에서 한창 자라는 두 아들과 함께하는 매일의 씨끌벅적한 일상을 살며 줄일 수 있는 물건도 한계가 있는 법.
역시 물건이 두 개이상이면 필히 두 단계든, 세 단계든 손품이 드는 정리는 필수였다.
그렇게 조금은 미적거리며 "썩 내키지는 않지만 해야하니 한다" 는 심정으로 정리를 매일 이어가다보니 천천히 정리라는 이름의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정리는 그 자체로 힘이 있었다.
햇살 건조가 다 되어 바싹 마른 빨래를 집으로 들인 후 하나 하나 개기 시작한다. 호텔식 수건 접기까지는 아니어도 캐비넷에 쏙 들어갈 수 있는 크기로 착착 접어준다.
아이들 속옷은 그냥 분류만 해서 수납 가방에 툭 던져 넣곤 했는데 남편이 첫째와 둘째의 속옷을 구분하지 못하겠다는 '항의'를 한 후로 가급적 차곡차곡 접어 넣는다.
이렇게 빨래를 개다보면 천천히 마음이 차분해진다.
여러 생각과 감정이 오고가던 속이 조용해진다.
부지런히 그리고 반복적으로 손을 놀리는 이 단순한 행위가 바람처럼 방향 없이 왔다갔다 하던 내 안의 풀썩거림을 멈추게 한다.
이제는 괜시리 속이 씨끄러우면 그 소음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빨래를 갠다.
수도원의 수사들은 반은 예배와 기도 그리고 또 하루의 반은 밖에서 노동 활동을 한다는데 다 이유가 있는 거였다.
몸을 쓰면 확실히 마음이 쉰다.
아들 둘이 놀기 시작하면 정돈한 집은 금세 어지러진다.
그러나 나는 꾸준히, 틈이 날때마다
우리 작은 집을 정리한다.
테이블 위를 치우고 나와 있는 의자를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침대 위의 커버를 반듯하게 다시 씌우고 그 위를 손 다림질을 해가며 정돈한다.
더 여력이 있으면 빗자루로 바닥을 쓴다.
그렇게 정리를 하다보면 내 삶이 단단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떤 일, 어떤 상황에서도 이렇게 어지러워진 것들을 하나씩 치우고 제자리를 찾아주는 시간을 정직하게 하나씩 통과하다보면 분명 끝에 다 다를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