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전공하고 영어를 가르치며 그야말로 영어로 밥먹고 사는 일을 20여년간 하고 있으면서도 점점 더 영어를 몰입하여 공부하지를 못한다.
학교 현장에서 나의 역할은 수업과 업무 그 사이를 종횡무진 왔다갔다하며 아침부터 퇴근하는 저녁 언저리까지 계속된다.
교사들 사이에서 "우리는 땡! 하루야"라는 웃픈 말이 있다. 시간 맞춰 "땡"하는 학교 종소리에 맞춰 돌아가는 하루를 자조적으로 표현한 것.
땡하면 수업가고 땡하면 교무실로 왔다가 다시 땡하면 화장실 가고 또 땡하면 밥먹으러 간다.
그 중에서도 제일 기다리는 건 학생들이나 교사들이나 마치고 집에 갈때 듣는 "땡"일 것이다.:)
그렇게 수업과 업무 그리고 중간 중간 반짝 회의 참석에 화장실 다녀오고 밥도 챙겨먹으려니 가만히 앉아 무언가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말 신문기사도 제대로 읽으려면 차분히 내용을 살펴야 이해가 되는데 영어로 된 짧은 영문기사는 그 배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영어전공자이지만 영문기사 헤드라인의 짧은 단어가 우리말 읽듯 금방 눈에 들어와 지지 않는다. 쑥 훓어봐서는 사실 이해도 기억도 되지 않기에 집중해서 읽을 수 없다면 처음부터 시작도 하기가 힘들다. 그러니 "땡"하면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하는 근무일과 중에 짧은 영문기사 하나 읽어보고자하는 시도는 자주 작심 이틀이 되곤했다.
그래서 더 빨리, 많이 읽는 영어다독으로 기울어졌는지도 모른다.
한국토박이 영어 학습자로서 사흘 이상 영어를 어떤 형태로든 접하거나 학습하지 못한다 싶으면 바로 불편한 조바심이 찾아왔다. 그나마 쌓아놓은 실력마저 금새 쭉쭉 내려가는 것 같아 무엇이라도 해야했다. 그래서 늘 곁에 영어책을 두고 지냈다. 그게 소설이든, 짧은 에세이든, 영자신문이든 일단 눈에 들어오는 곳에 두고 시간이 허락되는데로 읽어보려고 했다.
그러다보니 늘 짧게 늘 다른 일을 겸하며 반쪽 집중만 겨우 발휘하며 읽었다가 덮었다가 하다보면 무엇을 읽었는지 가물가물했다.
그래도 영어 한자라도 봤다는 것에 위안을 얻으며 보낸 시간도 많다.
육아휴직을 하고
그 부산함과 조급함이 조금은 가라앉고,
남들앞에 무언가를 가르친다고 서보려니
어떻게든 늘 부족하다는 느낌을 덮어보려했던
어설픈 시도를 더는 안해도 되는
환경과 시간을 얻고나니
다시 천천히 공부다운 공부를 해보고 싶어졌다.
당장 어떤 목적을 위해서도 아니고
나의 불안함을 달래기 위해서도 아니고
그저 조용히 집중하는 몰입의 즐거움을 다시 한번 더 누려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잡지를 한권 샀다.
주간"The Economist".
그리고 나의 목표는 잡지의 첫장부터 끝장까지 그 안에 실린 광고문구까지 다 읽는 것이다.
매일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딱 A4 한장 정도의 분량으로 스스로 제한을 두었다.
자리를 잡고 천천히 읽어가며
모르는 단어와 표현 하나 하나에 밑줄을 긋는다.
첫번째 읽기에서는 줄 긋기를 하고 단어의 의미 유추를 스스로 해본다. 앞뒤 문맥을 참고하며 어떤 뜻인지 일단 미루어 짐작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덮는다.
다음날, 똑같은 페이지를 다시 펼친다.
이번에는 탭의 사전어플도 켜둔다.
이제 다시 첫줄부터 읽으며 어제 뜻을 몰라 줄을 쳐둔 단어의 뜻을 하나씩 사전에서 검색해본다.
뜻을 확인한 후 해당 문장을 다시 읽어본다.
우릿말 문장을 읽을때처럼 명확하게 읽어질때까지 한문장을 읽고 또 읽는다.
시제도 확인한다.
필요한 경우 수업때 하듯, 긴 주어와 목적어 사이에 / 표시로 끊어읽기도 한다.
해당 문장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표현은 사전에서 여러 예문을 보며 쓰임을 확인하고 동의의 반의의 표현까지 살펴본다.
때때로 영 의미파악이 명확하지 않으면 구글검색에 문장을 그대로 옮겨서 추가 정보를 찾거나 아예 번역된 것을 확인하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의 핵심은 정확한 이해이다.
마치 한글 문장을 읽듯 명료하게 읽는 것이다.
이렇게 꼼꼼하게 정독을 하면 문장이 처음 읽을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다가온다. 글이 이해가 되는 정도를 넘어서서 문장의 결, 작가의 스타일, 실제 의도, 이야기 전개의 촘촘함 등 글의 진짜 매력과 멋스러움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제야 내가 이 글을 읽는다는게 실감이 된다.
글 안에서 내가 거닐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면 재미가 있어진다.
딱딱한 경제기사가 흥미 진진한 이야기처럼 생동감이 넘치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글을 읽는 내가 자신감이 붙는다.
글에 눌리지않고
주도적으로 글을 취하고 분석하고 결론을 판단해서 내 것으로 소화해내고 있다는 내면의 힘이 느껴진다.
그리고 시원하다.
영어자료를 읽기는했는데 사실 다 이해가 되지않아 늘 따라 다니던 회색빛이 걷히고 맑은 하늘을 보듯 깔끔하고 상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