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내 주머니는 맑고 강풍

어둠에서 빛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여정

by 주연

어렸을 때 사회시간에 병목현상이라는 말을 배웠었다. 차선이 좁아져 교통체증이 일어나는 등의 현상을 이르는 말이었는데 병목이 좁아지는 모습과 더불어 내게는 인상적인 개념어였다. 그런데 요즘 내가 딱 병목현상과 같은 때였다.


학교 일도, 방학 중 여행과 관련한 일도, 대학원의 과제들도, 학생들 책 출판해 주는 일도 죄다 몰려들어 학기말 좁아지던 시간에 모두 갇혀 버렸다. 일의 우선순위도 매길 수 없이 다 기한이 임박한 일이라 처리해 내기가 벅찼다. 바쁘게 일을 처리하다 보니 마감이 깔끔하지 않다 느껴졌고, 작은 약속도 쉬이 놓쳐 11월부턴 글쓰기 모임 마감도 못 지켰다. 또 바쁠 땐 마음 역시 인색해져 별 것 아닌 관리자의 배려 없는 말에 오래도록 서운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던 중 생애 처음으로 교통사고까지… 일련의 소용돌이 안에 내가 중심을 잡은 건지 못 잡은 건지도 모른 채 바쁜 일상에 허우적대고 있었다.


더 이상 디딜 곳이 없다 느껴졌을 때 다행히 방학이 찾아왔다. 그러나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친구들과 베트남 여행을 계획해 둔 나였다. 여행을 계획하던 지난봄쯤에는 학기 말의 내가 병목현상 중에 있을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래도 이번 여행은 슬리핑 기차와 슬리핑 버스도 타야 하니, 혹시나 싶어 작고 가벼운 책을 하나 넣었다. 최진영 작가의 책이었는데 동네 책방에서 지난가을에 사두고 한 장도 넘기지 못했던 책이었다. 바쁜 일상은 좋아하는 일조차도 미루게 만들다니 하며 작은 한탄이 새어 나왔다.


작고 가벼운 무게와는 다르게 이 책은 최진영 작가의 번민과 고뇌가 담긴 99번의 일기 같은 기록이었다. 최진영 작가는 기발한 사건 전개와 탁월한 묘사로 읽는 사람이 책을 놓을 수 없게 하는 글을 쓰는 반짝이는 작가인데 창작을 하는 동안의 고통과 괴로움이 고스란히 글로 박혀 있다. 하고 싶은 일 '장편 쓰기'를 자꾸만 미루는 자기 자신에게 한탄하고 소설 쓰기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시간을 원망하며 그러면서도 계속 쓰는 작가의 모습. 그동안 천재적이라고 생각했던 작가의 사소한 고민이 이상하게도 위로가 되었다.


"제주로 이사 오고 책상 앞에 '일기를 쓰자 날씨라도 쓰자'라는 메모를 붙여두었는데 며칠 전에 떼어서 버렸다. 지키기 어려운 다짐도 아닌 걸 기어이 지키지 않는 나의 한심함을 매일 글쓰기 전에, 글을 쓰면서 확인하는 것도 지겨워서."


아니 뭐야. 나만 이런 거 아니잖아. 해야 할 일들을 리스트로 적어두고 자꾸 미루며 못하는 나의 지난 나날들에게 나만 이런 건 아니었다는 작은 공감이 더해지자, 작가의 고민의 자취들이 더 궁금해졌다. 최진영 작가는 이렇게 번민하고 고뇌하면서 그러면서도 주변에 대한 사랑을 계속해나가겠다고 말한다. 일상의 좌절에 넘어지지 않고 꿋꿋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은 결국 사랑의 힘인 것일까.


나는 무엇을 하며 그렇게 바빴나. 내가 준비하던 미래는 무엇이었을까. 내 안의 어떤 불안이 나를 이렇게 바쁘고, 어딘가로 떠나게 만들었을까. 생각이 커지다 보니 결국 나는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바쁜 일상이 나를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나를 위한 시간을 앗아가고 있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바쁜 일상에 차여 허둥댈 때의 나는 얼마나 사나웠을까 타인의 작은 말 하나도 그냥 넘기지 않고 꼭꼭 눌러 분해했던 것 같다. 그런 시간들이 나를 갉아먹는 것을 모르는 체하며 악순환 속에 놓여 있었다. 그런 시기의 나를 기다려주던 내 친구들과 가족들. 진짜 소중한 것은 멀리 있지 않았다.


"글은 나를 떠나지 않으니까. 글은 언제나 내 곁에 있다. 비겁하고 치사한 나를, 옹졸한 겁쟁이인 나를, 괴팍하고 까다로운 나를 다 받아준다. 책과 노트와 펜만 있으면 나는 계속 살아갈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사람에게는 절반만 의지하고 책과 글에 절반을 의탁하면서 의젓하고 담대한 존재를 꿈꾸며 조용히 살아갈 수 있다.(중략)

거듭 넘어질 나를 위해 매일 글을 쓴다. "


방학이 찾아온 것은 다행이었다. 교통사고가 나서 쉬어야 했던 것도. 나는 이제 이 시간들을 나를 위해 쓰려고 한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들을 읽으며, 나를 일으키는 문장들에 기대고 의지하며 말이다. 그런 문장이 충분히 내 안에 스며들면 또 이렇게 쓰고 싶어 지겠지, 그런 글들의 손을 잡고 나를 사랑하다 보면 그 사랑이 내 주변에도 번지게 될 거라 믿어본다.


“동등한 애정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면 좀 더 사랑하는 쪽이 내가 되도록 해야지. -위스턴 휴 오든-"


그래서 다소 늦었지만 최진영 작가가 뽑은 문장에 기대 새해 다짐을 해본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먼저 사랑하는 사람. 남들보다 조금 더 사랑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겠다고. 나의 새해 다짐을 오래도록 잊지 않기 위해 다짐을 담아 꾹꾹 눌러 써본다.



(@ 인용구절은 모두 ‘내 주머니는 맑고 강풍’-최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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