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누]몽글몽글한 하얀 비누거품으로 누리는 행복
얼마 전 나의 글쓰기 모임인 주수희 친구들과 '연말정산'을 했다. 우리의 연말정산은 소득과 세금을 정산하는 것이 아니라 연말정산을 할 수 있는 여러 질문들로 구성되어 있는 작은 책자를 서로 써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벌써 이 년째 우리는 연초에 지난해 연말정산을 함께 한다. 작년 연말 정산 책자는 뜨개무늬였는데 올해 연말 정산은 초록초록한 잎사귀들의 그림으로 되어 있다. 그런 책자의 표지에 맞춰 초록초록한 카페에 모여 앉았다. 풀 향 가득한 올해의 연말 정산 질문 목록 중에는 이런 질문도 있었는데, '올해 환경을 위해 한 일은?' 사실 답이 금세 떠오르지 않았다. 편의를 위해 일회용품도 자주 이용하고, 물티슈 등의 미세 플라스틱의 주범들도 늘 사용하고 있는 나였다. 그러다 갑자기 떠오른 것은 '비누'. 샤워할 때 바디 워시와 같은 세정제 대신 수제 비누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바디워시와 같은 세정제에 비해 거품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플라스틱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이상하게도 여러 보습 성분이 있다는 그런 세정제보다도 덜 건조해지는 듯한 느낌에 몇 년 전부터 샤워할 때는 비누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주변의 지인들에게 비누를 자주 선물하기도 하고 새로운 브랜드의 비누나 심심풀이로 들어간 소품샵에서 발견한 비누를 유심히 보다 사 오기도 하는 나였다. 아들 둘을 키우고 남편까지 총 세 명의 남자와 함께 살고 있는 나는 거실 욕실을 남자들에게 내어주고, 안방 욕실을 혼자 사용하고 있다. 안방은 남편과 함께 사용하고, 주로 시간을 보내는 거실과 주방은 가족들과 공유하다 보니 때로는 이런 욕실만이 나만의 공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안방 욕실은 주로 나 혼자 사용하는 공간이다 보니, 내 취향에 맞는 용품들로 채워둔다. 두피에 좋다는 샴푸, 머릿결을 좋게 해 준다는 트리트 먼트, 샤워용 비누, 클렌징용 스킨과 같이 오랜 시간 나에게 맞고 필요한 용품들로 말이다. 그러니 습한 욕실이지만 나에게는 아늑한 공간이다.
그러다 보니 욕실에서 머리를 감아 트리트먼트를 바른 채 비누 거품을 많이 내 온몸을 씻어내는 샤워시간은 내가 좋아하는 시간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샤워도 얼마나 사치 같던지, 아이들 냄새로 범벅인 옷을 벗어두고 샤워라도 할라 치면 욕실 문 앞에서 엄마를 부르며 나를 애타게 기다리는 아이들 때문에 샤워시간을 여유롭게 누리지 못했더랬다. 그때는 아이들을 빨리 키워 여유롭게 반신욕 하는 나를 상상했는데, 지금은 정말 아이들이 많이 커 엄마가 뭘 하든 상관치 않는다. 그래서 느릿느릿 비누거품을 내고 나만의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샤워볼에서 몽글몽글 비누거품을 내다보면 하얀 비누거품이 주는 포근함에 하루의 피로도 스트레스도 조금은 씻어내는 느낌이다.
그래서일까. 아이가 어린 친구들이나 후배들에게 유독 비누 선물을 한다. 그때는 샤워조차도 편히 하기 힘들지만 아이들이 자거나 아빠 같은 다른 가족과 시간을 보낼 때만큼은 하얀 거품으로 육아의 어려움들을 씻어내길 바라며 말이다. 그리고 그네들이 누리는 행복이 부러운 나는 (그때는 그때의 행복을 알기 힘들었지만 말이다) 샤워하며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임을 알아차리길 바라며 선물한다.
나 역시 아이들이 어릴 때 나를 돌보기 위해 한 것은 고작 거품을 만들어 둔 욕조에 몸을 담그거나 (그마저도ㅠ아이가 깰까 두려워하며,,) 책을 읽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욕실에서 뽀얀 비누거품 속에 몸을 넣어두고 나면 육체적 피로가 풀려서인지 육아의 스트레스나 걱정들이 잠시 지워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그때는 육아에 치여 여유로운 샤워가 소원이었는데 생각보다 시간은 금방 가고 아이들은 빨리 커서 품에서 점점 멀어져 가 샤워시간 같은 것은 실컷 누리는 때가 왔다. 그렇다고 나의 일상의 걱정이나 불안이 사라졌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내 안의 걱정과 불안은 이제 다른 것들로 치환되어 그만의 크기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 이제 어쩌면 나에게도 비누의 마법이 필요할 때이다.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거나 또 미래를 걱정하며 불안해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 누릴 수 있는 걸 누리길. 몽글몽글한 비누거품이 마법처럼 현재의 행복을 알아차리게 해 준다면 좋겠다.
신학기가 다가오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방학, 바쁠 3월을 대비해 더 많이 읽고 쓰고 싶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쁘다. 책상 한편에 차곡하게 읽은 책을 쌓아둔다. 쌓인 책을 보며, 신학기의 불안을 애써 잊어본다. 벌써 이십여 년 가까이 신학기를 맞이하면서도 왜 이렇게 매번 긴장이 되는 걸까. 아무래도 오늘은 비누 거품을 충분히 내서 나만의 욕실을 누리며 불안과 걱정을 씻어내야 할 것 같다. 지금의 행복을 알아차리기! 비누의 마법이 통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