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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Sep 09. 2023

멈추지 못했던 공교육 멈춤의 날

무력하게 또 한 명의 교사를 보내며.

큰 아이가 3학년일 때 담임 선생님께서는 일기 검사에 참 열심히셨다. 글쓰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큰애였는데, 선생님께서는 늘 일기장의 한 구석에 진심 어린 피드백을 남겨주셨다. 일기 중에 좋은 표현에는 밑줄을, 일기에 있는 내용에는 공감과 격려를 보내주셔서 아이는 힘든 일도 일기에 적고 또 칭찬받고 싶은데 자기가 말하기엔 쑥스러웠던 작은 선행들도 일기에 적었다. 일기를 열심히 쓰지만 일기장을 제대로 숨기지는 못했던 어린 아들이었기에 일기를 훔쳐보는 나도 아이의 학교 생활과 요즘 하는 생각들을 슬며시 알 수가 있었다.


그러던 중 학부모 총회가 있어서 아이 학급에 가서 아이 담임선생님을 뵙게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참석한 학부모님들께 본인의 교육 방침 및 안내 사항들을 전하셨고, 우리는 경청하며 시간을 보내던 중 한 아이 아빠가 손을 들며 선생님께 물었다. “ 왜 일기를 검사하시는 거죠? 제 딸아이는 국어를 싫어하고 일기 쓰기를 힘들어합니다. ” 순간 선생님께서는 당황하시며 일기를 억지로 쓰게 하지는 않는다며 자율 과제라 아이가 원하지 않으면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나중에 상황을 보아하니 선생님의 피드백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경쟁적으로 일기를 쓰고 내게 되었고,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자기들도 선생님의 그 코멘트는 받고 싶지만, 일기는 쓰기 싫어 집에서 투덜댄 모양이었다. 아이의 투덜거림을 들어 넘기지 못하는 사랑 많은 아빠의 모습과 당황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은 내내 나에게도 지워지지 않는 순간이다.


아이가 어렸을 때 아이 친구의 엄마들과 간단히 밥이나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눌 기회가 종종 있었는데, 언제나 이야기의 화제로 올라오는 것은 담임교사나 학교 시스템에 대한 험담이다. 학교에 민원을 제기한 것을 자랑스레 말하는 엄마도 있었고 잘 해결되지 않는 사건은 교육청에 민원을 넣으라며 조언을 해주는 엄마도 있었다. 하굣길에 일어난 다툼으로 상처가 난 일을 두고 아이 아빠와 수업시간 중에 학교에 간 것을 말하는 엄마도 있었다. (선생님은 그 엄마 아빠와 상담하느라 더 많은 아이들은 아마 수업의 결손이 있었을 거다.) 나는 점점 그런 모임에 나가지 않게 되었고 우연히 그런 자리에 가게 되어도 더는 내 직업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네들이 나누는 그런 이야기들을 분명 집에서도 나눌 테고 교사를 존중하지 않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학교에서 교사에게 예의 바르기란 당연히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한참은 나를 씁쓸하게 했다.

 

사실 학교에서 민원을 제기하는 학부모님들은 소수이고 대다수의 학부모님은 학교와 교사의 방침을 따라준다. 그러나 그러한 민원에 좌우되는 곳이 학교임에는 부인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평가 기준안을 피드백받을 때, 이러한 규정은 민원의 소지가 있다는 피드백, 전체 회의 시간에 최근 이런 민원이 있었다며 민원 내용을 공유하고 그에 대한 대응을 마련하는 모습은 최근 학교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장면이다. 얼마 전 인근 학교에서는 생기부에 교사가 부정적 어휘를 사용한 것을 두고 소송에 걸렸다가 무혐의로 결론 난 일도 있었다. 무혐의가 될 때까지 3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렇다면 학교에 불만이 있고 교사에게 문의할 게 있어도 참아야 하는가. 당연히 아니다. 때로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민원으로 인해 교정할 때도 있고 학교에서 아이말만 듣고 오해한 부모님들과 대화로 상황을 잘 해결한 적도 많다. 그러나 문제는 이 모든 것을 교사가 직접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우리의 주 업무는 아이들의 수업을 담당하는 것인데, 때로는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아주 작은 쇼핑몰도 CS팀은 따로 있고, 그러한 CS팀 또한 당연하게도 근무 시간이 엄연히 있다. 그러나 교사는 학급의 모든 민원을 직접 담당하고, 또 우리의 근무시간은 존중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지금껏 악성 민원에 시달렸던 적은 없지만, 나의 앞으로의 남은 교직 생활에 전혀 없으리라고 확신할 수도 없다. 또한 학교에서 또 교무실에서 그러한 민원으로 고통받는 교사가 있다면 그게 어떻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될 수 있는가.


9월 4일은 공교육 멈춤의 날이었다. 학교는 멈추지 못했고 교육부는 멈추는 교사는 징계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재량 휴업일은 오히려 학생의 교육권을 보장하기 위한 학교의 선택임에도 정책에 무지한 것인지 아니면 어떻게든 시위 인원을 줄이려는 것인지 재량 휴업일을 지정하는 학교의 학교장도 징계하겠다며 강경 대응을 보였다. 교육청이나 교육부가 교사의 편에 서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었지만 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이번에 새로 알게 되었다. 결국 학교는 멈출 수 없었고 그날 많은 선생님들은 검은 옷을 입고 수업을 했다. 그리고 그 이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서이초 선생님은 아이들을 위한 상담실로 썼던 급식 창고에서 생을 마감하셨다. 뉴스에서 본 그 교실의 벽면에는 ‘배운다는 것은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라는 교사라면 누구나 마음에 품었을 그 구절이 적혀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교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때로는 아이들이 싫어하고 투덜대도 아이들에게 질서를 가르치고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하고, 어른에게는 예의를 친구들끼리는 배려를 나누게 하여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야 한다.


어떤 기사에는 학생 인권을 너무 강조해 학교가 망가졌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학생 인권을 다시 존중하지 않아야 하는가. 그것을 원하는 교사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러한 주장은 교사를 대체 무엇으로 보는지 허무하기까지 하다. 나는 과거에 숨 막히던 교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지 않다.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모든 아이들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로 존중받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나 역시 아이들에게 아주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기 때문이다. 함께 성장하고 성숙하는 곳이 학교가 되길 바란다. 더불어 미성숙하던 시절에도 존중받았던 기억이 아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로 성장하기를 바라며.


오늘 대전에서 또 한 명의 초등학교 선생님이 생을 마감하셨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일을 겪어야 하고 계속해서 손 놓고 슬퍼만 해야 할까. 아이들을 가르치고 학교에서 생활하는 것을 좋아하는 교사들이 세상을 등지는 비정상적인 요즘, 교사들이 진정 원하는 교육을 할 수 있도록 아동학대법이 개정되기를 바란다. 더 이상 학교의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 외에 다른 민원 대응으로 주객이 전도되지 않는 업무 환경의 조성을 원한다. 그리하여 더 이상은 학교에서 희망을 노래하려던 교사들이 스러지지 않기를. 열정과 의욕으로 아이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교사들이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결심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고인이 된 선생님들의 학교에는 추모의 발길이 이어졌다. 그러나 누군가의 딸이고 아내이며 엄마였을 선생님들은 다시는 그 가족과 만날 수 없게 되었다. 더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고된 시간 끝에 힘든 선택을 했던 선생님들이 부디 편안한 곳에서 편히 쉬시길 바란다.


@  표지사진는 pd수첩에 나왔던 서이초 선생님의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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