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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Aug 19. 2023

방학이 되었습니다

놓을 방+ 배울 학, 더 성장하기 위해 놓아주는 시기

방학이 되었다. 직업의 특성상 3월에 일 년이 시작되는 나의 경우, 3월부터 전속력 달리기를 7월까지 하는 삶을 살다 보니 7월 즈음에는 몸과 마음이 방전되는 기분이다. 몸도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고, 아이들의 사소한 태도에도 한 학기 농사를 잘못한 거 같아 쉬이 기분과 마음이 상한다.



이번 여름 방학은 유럽 여행을 준비하기까지 했으니 안 그래도 바쁜 7월에 몸과 마음이 어찌나 혹사되었나 방학식을 하루 앞둔 날 몸살이 왔다. 내 몸의 모든 세포 세포가 이젠 그만 쉬어야 한다고 말하던 그때 비로소 방학이 되었다. 사실 학교에서 고되고 힘들다고 느껴지는 시간들이 내 몸과 마음에 생채기를 남기기도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고난과 힘듦을 통해 성장한다고 믿는 나다. 그래서 이 힘든 시간들이 나에게 새겨져 나무의 나이테가 생기듯 나란 인간을 더욱 성숙하게 하고 있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견디고 이겨내려 애쓴다. 더불어 여름에 한 번 겨울에 한 번 긴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조금만 견디면 방학이야!라는 생각으로 살아가기도 하는 것이다. 사실 방학은 놓을 방에 배울 학자가 만나 만들어진 단어로, 학교에서의 배움을 내려놓는 시간이다. 그러니 나 역시 방학이 되면, 힘듦과 고됨으로 성장하던 배움을 내려놓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나를 채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방학이 되어 내가 놓고자 하는 것들은 이른 아침 기상, 하루에 4~5시간의 수업과 학생 지도, 내 머릿속의 지식을 수업으로 구상하여 학생들의 이해를 돕는 언어로 풀어내는 일 등이다. 머릿속의 지식들을 말로 풀어내는 일들을 계속하다 보면, 그럴 리 없겠지만 내 안의 지식이나 지혜가 닳아 없어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학기 말 이문재 시인의 시집을 읽다가, 나는 나를 너무 많이 사용해 버렸다는 시구에 울컥했던 기억이 있다. 열심히 나를 사용했으니 한 달여간의 방학 동안은 나를 열심히 채워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방학이 시작되면 어지러운 집을 정리한다. 바쁘고 힘들다는 이유로 마구마구 쑤셔 넣어버려 엉망이 된 옷장을 정리하고, 그동안 못 본 체했던 싱크대와 냉장고의 얼룩을 닦으며, 하루에 한 번은 청소기를 돌려 먼지 없는 공간을 만드려 한다. 그리고 요가나 등산과 같은 마음이 당기는 운동을 하기도 하고, 가장 많은 시간은 좋아하는 글을 읽는다. 더불어 교과와 관련된 연수도 듣고 다음 학기에는 어떤 수업을 할까 구상도 한다. 두껍고 어려운 책들은 방학을 위해 쌓아두었기에, 학기 중엔 잘 열지 않았던 벽돌 책들도 열어보고, 읽기만 하고 플래그를 붙여두기만 했을 뿐 독서록을 쓰지 못한 책들도 다시 열어보며 필사를 하기도 한다.

 

 아침에 조금 푹 자는 것, 내 몸을 위해 운동을 하는 것, 또 사용하기만 해서 비워진 듯한 나에게 좋은 문장을 넣어주는 것. 방학에 내가 나를 위해 하는 일이다.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가서 아름다운 자연을 보는 것도 좋은 전시가 있으면 다른 지역이라도 부지런하게 찾아가는 것도. 평소에 밥 한 번 먹자며 인사를 건네기만 했던 나의 소중한 지인들과도 소중한 대화의 시간을 갖는 것들. 방학이 아니라도 할 수 있지만, 평소에는 기운이 없어 만끽하지 못했던 순간의 평화를 방학은 맞이하게 해 준다.


그런데 이번 방학은 긴 여행을 다녀왔기에,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마음이 조급했다. 여행 중 책을 한 권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불안, 2학기에 박지원 작품을 수업하기 전에 열하일기 한 번은 더 읽었어야 했는데 하는 조급함. 엉망징창이던 나의 옷장과 싱크대들. 정리하지 못했던 집안의 구석구석들이 빨리 돌아오라고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여행 중에 꾸준히 일평균 2만 보는 걸었으니까 몸은 조금 건강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빨래를 돌리고, 건조기에서 뱉어낸 바짝 마른 옷들을 차곡차곡 개고, 정리하며 해야 할 일의 리스트를 잠결에도 생각하던 그때. 업무상 출장이 있어 하루 출장을 다녀오게 되었다. 시차 적응도 되지 않았던 그때 출장에서 업무에 관한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그만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왼쪽 발을 삐끗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왼쪽 다리에 반깁스를 한 신세가 되었다.


그제야 방학이 내게 하는 말이 들렸다. 방학은 놓아야 하는 시기라고. 자꾸 조급하게 나를 다그쳐 한 학기를 살아왔으면서 얼마 남지 않은 방학을 왜 그렇게 다급하게 생각하냐고. 나는 이미 여행에서 많은 것을 채워왔다고. 차곡차곡 내 안의 것을 정리하라고. 내가 정리해야 할 것은 옷장이나 싱크대가 아니라 내가 배우고 느낀 것들을 마음속에서 꺼내 가지런히 내 안에 담는 거라고.


그래서 나는 요즘 할 수 없이 집안일을 내려놓고 미뤄뒀던 책을 읽고, 여행기를 쓰고, 사진을 정리하며 추억을 되새기는 일을 하고 있다. 삶의 여백은 이렇게 채워진 일상을 차분히 정리하는 데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이번 방학이 나에게 알려주었다.

생애 첫 반깁스, 여백을 만들라는 하늘의 계시였을까?



채우지 못하면 뺄 것도 없다는 뜻일까? 많은 꽃으로 보기 좋게 화병 또는 공간을 채우는 걸 익힌 사람은 빼는 기술을 익히기도 쉽지만, 애초에 채우는 기술을 모르는 사람은 빼는 기술을 익힐 수조차 없다는 뜻이겠다. 여백은 빼고 남은 빈자리임을 잊지 말아야지. <@ 오하나, 계절은 노래하듯이>



<@ 대문사진은 이탈리아 여행에서 더위를 식혀주던 젤라토. 젤라토처럼 일상의 열기를 식히는 방학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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