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에 있는 사람을 나는 어떻게 보고 있는가.
김민철 작가와 함께하는 오독오독 북클럽의 두 번째 도서는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라는 책이다. '광막한'이라는 단어도 '사르가소 바다'라고 하는 지명도 모두 낯설어 작품의 이미지가 멀게만 느껴졌다. 광막하다니, 넓고도 막막한 느낌이 들어 사르가소 바다가 어딘지는 몰라도 손에 닿을 수 없는 머나먼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설을 읽다 보니, 주인공 앙투아네트는 그녀가 바라는 세상이 너무나 아득하고 멀게만 느껴졌을 것 같았다. 그러한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에 갇힌 그녀. 그녀의 이름은 버샤가 아니라 앙투아네트였다.
지난달 읽었던 [제인 에어]에서 우리는 모두 제인에어와 로체스터의 사랑에만 귀를 기울였던 것 같다. 로체스터의 대저택에 갇힌 '버샤'라고 불리던 미치광이 여자는 그저 로체스터와 제인에어의 방해자였을 뿐. 로체스터의 운명을 가엽게 만든 여자. 부유한 집안 형편을 이용해 로체스터라는 남자와 서둘러 비밀리에 결혼하며 미치광이 유전자로 인해 미쳐버린 여자로만 아주 짧게 묘사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가 왜 한평생을 그 저택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미치광이인 채로 살아야만 했는지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나조차도. 그러나 작가 진 리스는 그녀를 자신의 소설에 우뚝 세워둔다.
그렇게 소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는 그 버샤라는 여자의 인생에 주목하여 이야기를 풀어간다. 사실 그녀의 이름은 '앙투아네트'이며 '버샤'라는 이름은 로체스터가 마음대로 지어 부른 이름이었다. 로체스터는 '앙투아네트'와 정략결혼을 위해 자메이카 지방으로 긴 여정의 여행을 떠난다. 자메이카에 도착해 모든 것이 자신을 거부한다고 생각하며 오랜 열병을 앓았고 심신이 약해져 있을 때 '앙투아네트'라는 외모는 아름답지만 크리올(본래 유럽사람이지만 식민지 지방에서 태어난 사람) 출신의 여자와 급하게 결혼하게 된다. '앙투아네트'는 '로체스터'와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자신을 두렵지 않게 해 주겠다는 그의 따뜻함과 그가 주는 다정한 사랑에 마음을 허락한다. 마음을 허락한 채로 결혼하며 행복과 안정을 기대했던 앙투아네트와 낯선 곳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시달리던 로체스터의 출발은 처음부터 독자를 불안하게 만든다.
결국 '로체스터'는 '앙투아네트'의 말과 마음을 믿지 않고 헛된 소문을 믿어 그녀를 배척한다. 제대로 그녀를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자신이 속았다고만 생각하고 이런 결혼을 추진한 아버지를 원망한다. '앙투아네트'라는 여자를 미치광이로 만들어 자신의 저택 다락방에 가두어 두고 한 번도 찾지 않는다. 남편을 떠나 홀로 떠도는 삶의 결말은 당시에는 비참한 죽음뿐이었으므로 '앙투아네트'는 결국 '버샤'가 되어 그렇게 갇혀 여생을 보낸다.
영국 남자 로체스터는 백인이면서, 남자이지만 크리올이면서 여자인 앙투아네트의 집안에서 지참금을 받아 결혼하게 되는데 자신이 돈에 팔려가는 기분이 들어 처음부터 마음이 열리지 않았던 로체스터. 백인이면서 남자라는 우월한 지위인 자신에게 알 수 없는 현지어를 사용하며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문화와 행동을 하는 그 지역 사람들에게 강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반면 '앙투아네트'는 현지 원주민들의 적대를 받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곳의 자연과 사람들을 사랑하고 감정에 솔직하다. 어떤 피해의식도 없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행동한다. 그러나 그러한 솔직함은 로체스터의 피해의식과 두려움을 자극할 뿐이지만 말이다. 로체스터는 앙투아네트에 대해 호기심과 사랑을 갖는 대신 혐오와 적대를 갖는다. 제대로 된 이해의 노력 없이 낯선 문화를 배척하려 하고 결국 지참금을 챙겨 자신의 나라로 돌아온다.
소설을 읽으며 '앙투아네트'의 삶에 깊은 연민을, 편협한 시각으로 자신의 부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 '로체스터'에겐 분노를 느끼게 되었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는 수많은 '앙투아네트'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로체스터'일 수 있다. 낯선 문화를 가지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을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보는가. 그러한 소수의 사람들이 부르짖는 목소리를 나의 문화적 잣대로 평가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거대 자본과 선진국 중심의 문화로 소수 민족의 문화를 그저 혐오하고 배척했다면 나 역시 현대를 살아가는 '로체스터'가 아닐까. 현재의 앙투아네트는 소수 민족도, 성소수자도, 여전히 차별을 경험하는 여성도, 장애인도 그 모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쩌면 그러한 앙투아네트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이해하려 하지 않아 아무리 헤엄쳐도 빠져나올 수 없는 사르가소 바다에 가두는 납작하고 편협한 로체스터일 수 있다. 그러한 로체스터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 나와 다르고 생경한 것들을. 그런 이야기의 낯섦과 다름을 우열을 가리지 않고 이해와 포용으로 들어줄 때 우리는 납작한 시각에서 벗어나 입체적으로 앙투아네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의 앙투아네트들이 그런 다정한 눈빛과 사랑을 받아 생기 발랄한 본연의 모습을 그대로 사랑받는, 사르가소 바다에서 나와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 삶을 그렇게 상상해 본다.
(@표지사진은 온갖 해초로 덮인 사르사소바다. 실제 자메이카 근처 해변으로 수초가 많고 바람이 잘 불지 않아 배가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힘든 지역이라고 한다. 거기다 광막하기까지 하다면 어떤 막막함일지 그려진다. 출처는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