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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정 Oct 09. 2021

My body, My choice-마스크를 벗을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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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인들은 마스크를 잘 씁니다.

나는 한 번도 정부의 마스크 쓰기 정책에 대해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다.

아마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럴 것이다.

K방역이 전 세계인들을 놀라게 한 것도 정부 지시에 불만 없이 잘 따르는 국민들이 있었기에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한편, 서구권에서는 마스크 쓰는 것에 대한 불만이 상당하다고 한다.

그들이 조금 더 개인주의적이어서,  마스크를 쓰는 불편함도 감수하기 싫은 건가?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들을 타인의 감염에 무심한, 자기 편한 것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들로 치부한 것이다.


캐나다에 가 있는 베프도 팬데믹 초반에 여기는 마스크 아무도 안 써!라고 해서 놀라웠는데, 그녀의 설명은 그렇다. 여기는 한국처럼 복작거리질 않아. 물론 순응적인 한국인답게 그녀는 일회용 마스크를 썼다.




https://www.wsj.com/articles/why-shutdowns-and-masks-suit-the-elite-11624038950


#2 왜 셧다운과 마스크는 엘리트들에게 어울릴까?

최근에 읽은 WSJ 기사 제목이다.

이 글은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 그리고 팬데믹과 그에 따른 정부의 제한 조치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앗아갔는가를 말해준다.


인간은 몸을 가지고 있으므로, 취약한 존재이다.

감염이 될 수도 있고 다칠 수도 있다.

한편 인간은 몸이 있으므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정한 포옹을 할 수도 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지 못하는 것들 - 예를 들어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 일터를 나가게 못하게 하고 대신 수당을 쥐어주는 것들은 사회적 자아로서의 인간을 무시하고, 결국 인간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소위 엘리트들은 책상에 앉아서 펜대만 굴리므로 인간이 "몸"을 가진 존재라는 점을 잊는다.

그러니 셧다운, 마스크 쓰기 같은 정책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 기사의 내용이다.




#3 My body, My choice.

위 구호는 주로, 낙태금지 반대 시위를 할 때, 낙태를 포함한 내 몸의 결정권을 주장하는 데 사용된다.

그런데 이 슬로건은 요새 "마스크 쓰기 반대 운동"에서 사용된다고 한다.


내 몸은 내 선택은 맞다.

내가 마스크를 안 써서 감염이 되는 것은 나의 선택이다.

그런데 내가 남에게 감염을 시키는 것도 나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위 슬로건은 내 결정에 대한 책임이 오로지 나에게 있을 때 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한편, WSJ의 기사는 우리는 "정신"이 아닌 "몸"을 가진 존재이고, 어떠한 규제를 할 때는 "몸"을 고려해야 한다는 신선한 관점을 보여준다.

위 기사의 주장처럼 마스크를 쓰는 것이 우리를 타인에게 더 무심하게 만드는 것일까?

기사의 본문에서, '팬데믹에 취해진 조치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못 보게 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아니요."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말한다.


2년 가까이 이어온 지루한 셧다운과 마스크 쓰기 등의 조치는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와 혼밥 문화를 양산했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미국인들이나 캐나다인들이, 단지 개인주의적이어서, 마스크 쓰기가 귀찮아서 그러는 건 아니라는 건 알겠다.


그렇지만, 나의 사회적인 권리와 살 권리가 충돌할 때는 "살 권리"가 우선시되어야 하는 게 아닌지.

결국, 가치판단의 문제이고, 가치는 개인마다 다르다는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봐야 하는 건가?

생명의 위협에서도 '상대주의'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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