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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정 Dec 04. 2021

재능과 직업은 다르다.

워킹맘 이야기

#1 나의 재능을 발견했다. feat. 바느질

20대 중후반을 해외에서 근무했다. 결혼을 하면서 직장을 그만두고 귀국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나는 바로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다.

'한국에서 재취업을 해서 버젓이 자리를 잡은 다음에 아이를 낳아야지.' 생각했다.

그런데 인생은 늘 그렇듯이 내 마음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난 임신임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비 자발적인 전업주부가 되었다.

임산 초반에는 몸조심해야 한다는 말에 어디 나갈 생각을 못했는데,

임신 중반쯤에는 동네 맘 카페에서 펠트 바느질로 육아용품을 만드는 모임이 있어 바깥바람도 쐴 겸 나가게 되었다.


이때 나도 몰랐던 나의 재능과 적성을 발견했다.

나는 도안 그리기와 바느질에 재주가 있었다.

- 고등학교 때 미술 선생님이 크로키 몇 개를 그린 것을 보고 이 쪽으로 진로를 잡아볼 생각이 있는지 지나가는 말로 물어본 적은 있었지만, 미술을 전공으로 삼아도 될 만큼 그림을 잘 그린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어찌나 바느질에 심취했던지!

만삭인 배로 엄마들과 동대문 도매상에 가서 대량으로 원단을 떼왔다.

내 것뿐 아니라 나 보다 몇 달 느리지만 비슷한 시기에 임신한 시누이 육아용품까지 다 만들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가끔은 임부가 끼니도 건너뛰며 바느질을 하는 걸 보고 남편은 기가 막혔던 것 같다.

집안에는 헝겊 나부랭이들과 실밥이 굴러다녔고 가뜩이나 좁은 집은 내가 만든 각종 인형과 쿠션들로 더 좁아졌다.

남편은 내 새로운 취미 생활이 이해도 안 가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던 것 같다.

한 번은 12 지상을 모티브로 만든 볼링핀을 티브이 위에 일렬로 진열해 놓은 걸 보더니, 버럭 화를 내고 죄다 버렸다.

- 내 당신을 이제는 용서하리. 우리는 어렸으니까.

임부가 끼니도 거르고 팔이 퉁퉁 붓도록 바느질하는 상황이 이해가 안 가서였다고 치자.

당시 나는 하루 종일 바느질을 해서 혈관이 손목에서부터 팔 중간까지 튀어 올라와 있었다.


#2 바느질이 돈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임신을 해서 집에 있으면서도, 언젠가는 취업을 해야 한다는 게 항상 머릿속에 있었다.

사회 초년생이었던 남편의 벌이는 내가 아무리 아끼고 아껴도 외벌이로 아이를 키우고 살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다. 외동인지라 친정을 도와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었다.


'바느질이 돈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월 200만 돼도, 평생 이것만 해도 좋을 텐데...'


물론 우리 모임의 짱은 바느질로 수익을 창출하는 상황이었다.

본인의 집 거실에 엄마들에게 재료과 한 끼 식사를 제공하고 회비를 받는 식이었다.

나도 이걸 사업으로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일단, 우리 집 거실은 사람을 부르기에는 너무 비좁았다.

게다가 내 자체가 나 혼자 하는 건 잘하는 데, 여러 사람을 이끌며 무언가를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 좋아하지 않는 거지 못하는 건 아니다...라고 굳이 쓴다.


#3 사주가 말하는 나의 소명은?

지금은 바느질을 진로로 선택하지 않은 것을 잘한 결정이라 생각한다.

얼마 전 사주를 봤는데, '천궁'이 있으니 배우고 가르치는 걸 하라고 했다.

그리고 직업을 물어보시길래 회사 인사팀에서 근무를 하고 있고 노무사라고 했다.

"그 일도 그럭저럭 괜찮네."

그분 말에 의하면, 내 원래 운명은 선생님이다.

- 그분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대학 전공대로 갔다면 지금 나는 중고등학교 사회 선생님이었어야 했다.

- 선생님이 못된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사주에 따르면) 내 팔자에는 해외를 한 번 다녀오거나 살아야 했고, 나는 20대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내면서 순리대로 잘 풀었다고 생각한다.


#4 나의 직업 변천사

내가 바느질을 업으로 선택했으면, 하고 싶은 일을 해서 더 행복했을까?

10대 때 내 꿈은 만화가였다. 책과 만화를 너무 좋아했고, 끄적끄적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해서였다.

화가도 생각해본 적이 있었지만, 젊어서 화실을 열고 쫄딱 망한 엄마 말에 의하면 그림은 돈이 안되니 그냥 공부를 하라고 했다. 그리고 그닥 대단한 재능이 있지도 않았다.


고등학교 때에는 주변에서 선생님이 잘 어울린다는 말을 듣고, 별생각 없이 사범대로 진학을 했다.

교생실습을 나가보니 갑갑한 학교 분위기가 나랑 맞지 않았다.


20대에는 항공사 승무원으로 살았다.

대학 때 옆집 언니 따라서, 외국인 길 안내 자원봉사를 했었고 그걸 계기로 언젠가는 해외에 나가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단지 해외에 나가고 싶어서 선택한 직업인데, 생각보다 잘 맞았다.

나는 사람들과의 교류로 힘을 얻는 타입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정신없이 일하고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모든 것이 끝나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육체노동의 묘미는 시마이에 있다!

사람은 무언가를 직접 경험해보기 전까지는 그게 잘 맞는지 안 맞는지를 모른다.


30대가 되어서는 우연한 기회에 개인병원에서 사무를 보았고, 그 걸 계기로 중소기업에 비서 겸 급여 담당자로 들어갔다.

이후 이직을 한번 더 했는데, 그 회사가 급여가 밀리면서 노조가 결성이 되었다.

같이 일하던 팀원들이 차례로 그만두었고, 얼결에 남아서 노조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 김에 노무사 시험도 봤다.

한 문장으로 쓰면 노무사 시험을 본 거지만, 그 과정에서 정말 많은 걸 잃고 또 얻었다.

잃은 것 중에 가장 큰 것은 아이들과 어린 시절을 충분히 감사히 여기면서 보내지 못한 것이다.

몸도 곯았다.

얻은 것은 (이전에 비해)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다는 점이다.

이직을 하면서 내 근무여건도 개선되어 이전처럼 야근을 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이 커 가는 상황에서 장기적으로는 잘한 결정이다.

-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는 월급이 적으면 일이 적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중소기업이 훨씬 일이 많다. 일당 백을 해야 한다.


#5 이 길이 내 길인 걸까?

현재 내 일이 나랑 잘 맞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난 전공이 법도 아니고, 뭘 꼼꼼히 따지는 타입이 아니라 늘 legal mind가 부족하다는 소릴 듣는다.

'좋은 게 좋은 거지'라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문과 타입이다.

법도 문과로 분류되지만, 내가 보기에는 수학에 가깝다. 그리고 나는 수학을 매우 싫어했다.


적성에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현재 내 일에 어느 정도 만족한다.

사주가 말하는 나의 소명대로 선생님이 되지는 못했지만, 평생 배우고 남에게 알려주는 일을 하면 내 팔자대로 사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6 무엇을 할지 모르겠다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자기소개를 하거나 장래희망을 발표할 일이 있다.

아이가 다니던 태권도장에서는 취학 전 아이들의 부모를 초대해서, 발표를 하는 자리를 가졌다.

둘째는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뭐하고 싶냐라는 질문을 받으면 어떤 직업을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아직 내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뭘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아기를 100마리 낳고 싶고, 좋은 아빠가 되고 싶어요."

- 아이가 어린이집 다니던 시절이니 100마리는 양해하도록 하자.


사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명확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 역시 주변에서 선생님이 어울린다는 말에 사범대로 진학했고, 해외에 나가고 싶어서 국내 항공사, 나중에는 외국 항공사에서 근무를 했으며, 얼결에 인사팀에서 근무하다 노무사가 되었는데...,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

그러니 특정 직업을 목표로 하는 것도 좋지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우선일 것 같다.

경험이 쌓이면 내가 중요시 여기는 가치들이 무엇인지, 내가 참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참을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 잘 알게 된다. 직업은 그때 결정해도 좋겠다.


부언하자면, 내 경우에는 철없던 20대에는 몰랐지만, 경제적인 가치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중요했다.

급여가 많다면 아주 싫은 일이 아니고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 아니라면 웬만큼 할 의향이 있었다.

그러니 우선은 경험을 많이 하고, 나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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