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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정 Feb 19. 2022

그 시절 그 책들

워킹맘 이야기

책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주저하지 않고 "좋아한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책을 좋아하는 지를 물으면 조금 망설여진다.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조금 많이 진지했기 때문이다.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추천 하나만 해주세요."라고 지나가는 말로 물어보면,

(내 마음속은) '서인하 작가의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 정말 재미있어요. 한번 읽어보세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최근에 내가 읽었던 책 중 그나마 상대방에게 도움이 될만한, 그리고 나의 면이 설만한 책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 우리 집에는 책이 딱 한 권 있었다. 아름다운 비늘을 가진 물고기? 이야기였다. 나는 그 책을 닳고 닳도록 봤다.- 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한 세대다. 나중에 그 국민학교가 황국신민학교의 줄임말임을 알았다. 그렇다 한들, 내가 애정 하는 유튜버 책한민국님의 말 따나, 가치와 사실은 다르니, 나는 '국민학교'를 다녔다고 표현해야 맞는 말일 것 같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떠드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으나, 그때는 다들 그러려니 했다. 우리 집은 당시 할머니와 내가 몸을 뉘이기 위해 다리를 접어야 했고, 부엌이 없어 물결모양의 플라스틱 지붕을 넓게 내린 공간에 간이 칸막이를 치고 연탄 화로를 두었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학교를 못 갔던 날도 부지기수였다.  화장실은 당근 공용. 수돗가는 여러 사람들이 같이 썼었다. 미아리 산비탈의 어느 판자촌이었는데, 커서 보니 다 재개발이 되어 지금은 아파트들이 빼곡히 있다. 그러니 책을 놓을 공간이 어디 있었으랴.


시간은 너무나도 많고, 약간 주눅이 들어있던 성격과, 동네 드셌던 언니들을 피해 혼자 있었던 탓에, 나의 친구는 흑백 TV였다. 니들 중에 하나는 상습적으로 나를 때리기도 했다. 당시 어른들은 그걸 알았는지, 몰랐는지 모르겠다. 알았지만 귀찮아서 방치하지 않았나 싶다.


2학년 때인가 내가 이사를 가게 되자, 국민학교 고학년이었던 그 언니는 자기가 화풀이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그 언니만의 문제랴. 언니의 엄마는 계모였고, 이미 고등학생이라 다 컸던 딸과, 자기가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아기 때부터 키워 친자식처럼 이뻐하던 막내딸, 그리고 애매한 나이의 언니가 있었다. 그 집 엄마는 어린 내가 보기에도 왜 저럴까 싶을 정도로 언니를 말도 안 되는 갖가지 이유로 혼내고 때렸다. 당시 나도 언니가 불쌍했던 것 같다. 용서를 하네 마네 그런 감정도 없던 걸 보면.


딱히 어울릴 또래 친구가 없던 나는 정말 하루 종일 TV를 봤다. 학교에 가서도 거의 누가 말을 걸기 전에는 말을 한 적이 없어서 그랬는지, 친구도 없었다.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좋았던 건 교실 뒤편에 학급문고가 있다는 거였다. TV 이외의 오락거리가 생겨서 신났던 기억이 난다. 그림책에서 신데렐라가 입었던, 움직일 때마다 부드러운 물결을 그렸던 푸른빛의 드레스그리 이뻤다. 외국에 대한 동경은 그때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책은 나에게 또 다른 TV였다. 나는 손에 집히는 대로 책을 읽었다. 우리 가족도 엄마가 하루에 4-5시간밖에 못 자고 일을 한 덕에, 2학년 말인가에는 '집'이라는 공간을 갖게 되었다.

엄마는 구색을 맞추고 싶으셨던 건지, 아니면 돈을 못 받고 대신 받으신 건지(후자였던 듯하다.) 소년소녀 세계 명저 50 같은 책과 세로줄로 쓰인 두꺼운 전집을 갖다 두셨다.

진작에 세계 명저를 클리어하고 그중 소공녀, 소공자, 빨간 머리 앤은 대여섯 번을 읽고 일부는 외우기까지 한 터라, 심심했던 나는 세로줄 책도 빼서 읽기 시작했다.


제목은, 흠 보바리 부인, 적과 흑 이런 거였는데, '보바리 부인'은 읽다가 이 뉘앙스 무엇?, '적과 흑'은 왜 저 사람은 목 잘린 사람 머리를 들고 키스를 하는 거지?라는 정도의 감상을 남겼다. 제일 힘들었던 건, 햇빛이 눈부시다고 사람을 죽인 남자 이야기였다.

책은 수준에 맞는 걸 읽어야 한다. 조금 커서 읽었으면 조금 달랐으려나? 그 이후로도 저 책들은 다시 보지 않았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인가는 사람들 이름이 몇 글자인지 세 보다가 안 읽기로 결심했다. 내 인내심이 좀 얄팍하기도 하지만 세상에 읽을 것 천지인데 뭣하러 나를 괴롭히는가.


고 무렵 시드니 셀던을 만났다. 중학교 때 베프는 4남매의 막내였고, 위에는 이미 다 커서 일을 하고 있던 오빠 2명과 고등학생 언니가 있었다. 시드니 셀던 전집은 오빠들 방에 있었는데, 빌려가도 되냐고 물어보자 친구가 선선히 빌려주길래, 나는 내가 봐도 되는 책인 줄 알았다. - 아마도 그 친구는 그 책을 안 읽었던 것 같다. 시드니 셀던 시리즈는 세계는 넓고 세상에는 별 일이 다 있구나를 깨우쳐준 작품들이다. 므흣하게 야하기도 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했긴 했지만, 독서도 재미 위주로 했던 지라, 뭘 읽었나 돌아보면, 일관성이 없다.

소위 소년소녀 명작 00부터 얄개 시리즈, 할리퀸까지...

- 민망해서 자기 검열 차 덧붙이자면 고전도 보긴 했다. 그것도 재미있는 거로만, 예를 들자면 오만과 편견, 이건 빅토리아 시대의 로맨스 소설 격이다.

고등학교 시절 가장 많이 읽은 건 할리퀸으로 불리던 로맨스 소설들이다. 난 이걸 심지어 고등학교 때도 하루에 많을 때는 3-4권씩 읽었다. 일단 스토리 라인이 고정적(신분차 클리셰, 쌍방 오해물 등)이라 어떻게 전개될지 뻔히 예상돼서 막힘 없이 쭉쭉 읽을 수 있었다.

달라지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배경, 외모의 설정값 정도랄까? 외모의 설정값도 90년대의 할리퀸에는 일관된 공통점이 있었다.

한결같이 구릿빛 피부, 눈동자 색은 초록색이 많았던 것 같고, 몸이 많이 좋았다.

운동 특기생으로 대학을 와서 법학을 전공한 변호사나 멀쩡하게 생긴 재벌 2세가 많았다.

심지어 여주한정 다정한 여주바라기들이었다.

요새 보는 웹소설은 판타지는 흑발에, 핏빛 눈동자를 가진 북부 대공, 현대물은 본부장님, 실장님, (역시나) 재벌 2세 또는 3세, 변호사, 의사 등의 전문직 등이 많이 나온다.


대학을 가서는 아이들과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나만 이렇게 삐딱한 건가 싶었다. 다들 너무도 건전하고 발랐다. 97년도의 사범대는 학생운동의 여파가 남아있었다.

얼결에 가입한 교육학회에서는 제목도 기억이 안나는 구조주의 관련 책들을 읽으라 했었다. 학회 모임 때, 난 안 읽었다 미안하다 했는데, 당시 읽지도 않은 놈이 썰을 푸는 걸 보고 기가 막혔던 기억이 난다.


둘째 게임 학원을 바래다주고 홍대 주변을 어슬렁 거리는데, 만화카페가 있길래 들어가 보자고 하니 남편은 한 번도 중고등학생 시절 만화방을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럼 무슨 재미로 살았어? 그랬더니 그런데 가면 안된다고 생각했다고.


난 댕기, 윙크의 열렬한 구독자였는데, 연재되던 만화책이 책으로 묶여 나와도, 그림은 크게 봐야 한다며, 매달 나오는 연재분을 모아 따로 제본을 해서 봤었다. 바람의 나라 김진님은 펜 사인회도 갔었다. 그때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김혜린, 강경옥, 이정애, 신일숙 등 당시 내가 애정 하던 작가들이다. 첫 스타트는 고전적인 이미혜의 '인어공주를 위하여'였지만, 나의 베스트 작가는 언제나 김진이였다. 그의 작품은 좀 우울하긴 하지만 중2 감성이었는지, 나는 그의 그림체, 대사 모두 좋아했었다.

외국 작품으로는 유리가면, 베르사유의 장미를 좋아했다. 나중에 베르사유의 장미는 다시 읽어보다 그만두었다. 그때는 그 그림체들이 그리 이뻤는데, 그 시절 그 감성이 아니었다. 추억을 추억으로만 두는 것이 좋은가보다. '어느 날 갑자기 공주가 되었다.'식의 화려한 웹툰 그림체에 이미 익숙해졌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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