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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정 Jun 03. 2022

영어로 입 터진 날

직장 생활 소고

*초이스 작가님 글을 읽다 호텔리어랑 대판 했던 그날의 경험이 떠올라 옮깁니다.

https://brunch.co.kr/@williams8201/90

영어로 입 터진 경험

샌프란시스코 호텔이었다. 하룻밤 새, 같이 비행간 동기 언니 몸에 빨간 반점 같은 얼룩이 생겼다. 아무래도 진드기에 물린 것 같단다. 언니는 호텔에 이야기해서 방을 바꿔달라고 하던가, 침대 시트를 갈아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나 대신 네가 좀 말해줄래?"라고 하길래 별생각 없이, 알았다고 했다.


프론트 총괄이려나? 30대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 잘생긴 백인 남자가 있었다. 정중하게 말을 고르고 골라 부탁했다. pls를 섞어가면서.

그런데 그 노무시키가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몸은 씻은 거야? 네가 더러워서 그런 거 아니야?"


순간 빡 돌았다.

개뿔 pls. 난생처음 영어로 입이 터지는 경험을 했다.


난 겁이 많다. 문장을 말할 때 한 번씩 내 머릿속에서 돌려봐야 한다. 머릿속에서 말을 고를 새도 없이,

"방금 네가 한 말은 잘 기억해둘 거야. 나는 본사에 널 리포트할 거야. 당장 우리 회사랑 연결된 의사를 불러. 너희 호텔 진드기로 그녀는 병원 진료를 받게 될 거고, 이 모든 내용은 우리 회사로 보고될 거야."라고 했다.


그는 갑자기 친절해졌다.

방이 없으면 침대 시트만 갈아달라 했는데, 처음에는 그 조차 안 해줄 것처럼 굴더구먼, 바로 동기 언니 방을 옮겨줬다. 회사와 계약이 되어 있던 의사도 연결해줬다. 언니는 약 처방을 받았고 울긋불긋했던 피부는 가라앉었다.


그녀=고상한 여자

이 모든 해프닝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지켜보던 언니는 나에게 한마디 했다.

"넌 고상하지 못하게 호텔 프런트에서 큰 소리를 내니?"


난 순간 네가 잘못 들었나? 했다. 난 방금 언니를 위해? 싸운 거라고? 이건 내 일도 아니었다고. 이건 언니 일이었어! 우린 저 백인 총각한테 인종차별을 당한 거야?! 상황이 이해가 안 되니? 언니?

라고 말할 뻔....


지금이야 40대 아줌마가 되어서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만, 당시 나는 병처럼 싫은 소리를 잘 못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언니, 미안." 또는 어버버 하면서 아무 말을 못 했을 것이다.

니들 몸이나 씻으라는 호텔리어한테 나는 어떻게 고상하게 대응했어야 했을까?


나=악착같은 여자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돼서 명동에서 동기들을 만났다. 나는 큰 아이를 아기띠에 메고 동기들 만나러 호텔 커피숍에 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취업이 잘 안 돼서 고민이라는 말에,

동기 언니가 건넨 한마디.

"레오야, 심심하면 대학원이나 가지 그래. 아이도 어린데."


그 언니랑 사이가 나쁘냐고? 전혀.  

언니는 그냥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 내가 언니 말을 까지 않을 것을 알았다.  

"난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되는데? 어머, 넌 안됐다."

이 말이 하고 싶은 거였겠지.

인간이나 보노보노 원숭이나 무리를 짓고 서열을 메기는 것이 본능이라지만, 굳이 그랬어야 했을까?  

"난 너보다 잘살아. 난 시집 잘 갔거든." 굳이 그녀로 빙의해서 말을 보태자면, "네가 잘나 봤자지."

언니는 서열싸움을 하고 싶었던 거다.


생긴 대로 산다.

생긴 대로 살아야지. 고상하지 못한 걸 어쩌겠는가? 내가 악착같이 산다고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나를 착취할지언정, 남에게 내 할 일을 미루거나, 나 하나 잘 살자고 남의 것을 빼앗는 것도 아닌데, 고상하지 못한 걸 부끄러워할 이유가 뭐가 있는가?  

말이 고상하다고 사람이 고상한 것도 아니다. 고상하고 품격 높은 말로 다른 사람 상처 주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  

언니는 영리했다. 애초에 자기 일이 아니던가? 의사 진료까지 받아놓고, 고상하지 못하다는 말을 내뱉어도 내가 따지지 않을 것을 알았겠지.


어떤 사람들은 이게 옳은 것인가 옳지 않은 것인가를 따진다.

어떤 사람들은 이게 나에게 득이 되는가 아닌가?  

어떻게 하면 나 대신 저 사람을 일을 시킬 수 있을까?를 따진다.


그게 영리한 행동임을 머리로는 알지만 몸으로는 차마 실천하지 못하는 걸 보면 역시나 성격이 팔자. 사주는 사이언스다.(윤짱 작가님에게 배운 말이다.)

<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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