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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정 Jun 11. 2022

난 개싸움, 자신 있거든.

직장 생활 소고

인연이 신기하다.

둘째를 낳고 100일이 되어서, 다시 취업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렸다. 이력서를 올린 다음날, 기적같이 전화가 왔다. 인사 업무를 할 수 있는 비서 포지션이란다. 회사가 아무리 멀다 한들 어떠하리. 이런 기회가 어디 있나? 면접을 보러 갔다. 헛 배우는 것은 없는지 큰 아이를 낳고 잠깐 취업했던 병원에서 사무 업무를 봤던 게 나름 이력이 되었다.


언니는 내가 입사하고 며칠 뒤에 입사를 했다. 언니도 이력서를 올리고 바로 전화를 받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알고 보니 사장님 취미는 이력서 검색하기. 회사는 대기업 두 군데를 생산자와 소비자로 끼고 B2B 영업을 하던 곳이었다. 딱히 매출 걱정 없지. 일은 없지. 출퇴근 시간에 나가면 차 막힌다고 퇴근은 밤 10시, 10시 반에 하지. 시간이 남아도니 이력서만 그리 주구장창 보았던 것이다. 덕분에 내 퇴근시간도 항상 밤 10시, 10시 반이었다. 8시 출근에 10시 퇴근, 게다가 우리 집에서 회사까지는 한 시간 반이 좀 넘게 걸렸다.


정의로운 그녀

고스펙의 경단녀들... 언니가 말한 언니와 나의 공통점이다. 나는 아니지만 언니는 고스펙이라 할만했다. 외국계 기업에서 현대 삼성보다 높은 연봉을 받던 중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MBA를 했으니.


MBA를 하고 나면 취업이 더 잘되지 않냐고? 아니란다. 오히려 일 시키기 부담스러워하는 곳이 대부분이라고. MBA 이후 들어갈 수 있는 곳은 대기업뿐, 거긴 남자를 뽑는다. MBA = 경단, 다를 바 없단다.


언니는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한 달 그만뒀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말하지 않으련다. 여기서도 인생을 쓰게 배웠다. 나는 1달 만에 퇴사를 하겠다고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사장이 수리를 안 해줬다. 인수인계할 사람을 구할 때까지는 다니라고 하더니 사람을 뽑지 않았다. 언니는 고맙게도 사장에게 자기가 해결하겠다고 하고, 내 업무 중 일부를 아웃소싱 업체로 넘겼다. 그리고 본인도 퇴사.


언니 왈,

"이럴 때는 깔끔하게 집안에 일이 있다고 해야지. 그리고 세세하게 물어보면 절대 대답하지 말아야 해요."

언니 나름의 팁이다. 이렇게 말해야 사람이 있어 보인다고. 리고 못 잡는다고 한다. 집안일이라는 데 어쩔 거야? 나치게 솔직하면 없어 보인다는 조언도 해줬다. 언니, 그런데 그게 잘 안돼요.


언니는 이직 고민 중


언니, 나는 2010년 두 달 인연으로 만나, 매년 얼굴을 보고 있다. 아무리 바빠도 송년회 한다. 1년에 한 번은 얼굴을 봐야지. 지금은 서로 회사 가까워졌다.

목요일이었나? 언니에게 톡이 왔다.

"잠깐 시간 돼요?"

"언니, 오늘 스터디 없어서 괜찮아요."

"몇 시까지 들어가야 돼요?"

"8시요."

"맥주는 글렀군. OO옥에서 봐요."


언니는 이직 고민 중이었다.

현재 회사(A) : 높은 연봉, 경쟁력 있는 동료들, 임원 승진 못하면 나가는 분위기

오라는 회사(B) : 현 연봉은 맞춰줌, 적당히 일하는 동료들, 정년까지 일하는 분위기

오라는 회사는 지금 회사 이전에 다녔던 곳이다. 그만둔 회사에서 다시 오라는 걸 보니, 언니, 진정한 능력자!


연봉 : 연봉은 맞춰준다지만, 성과급을 고려하면 연봉은 기대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다.  - [A > B]

근속 : 현재 회사는 50 넘어 일하려면 임원으로 승진해야 한다. 임원 승진은 불투명하고, 노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인맥+운이 필요하다. - [A < B]

동료 : 현재 회사는 정은 없지만, 일은 잘한다. 지나치게 경쟁적이지만, 긴장감이 있단다. 오라는 회사는 서로 돕는 분위기다. 어차피 얼굴을 오래 볼 사람들이다 보니 서로 조심한다. 그럼 A < B냐고? 바로 단정 짓기가 어렵다. B는 이 구역 미친*이 있기 때문이란다.

회사를 선택할 때, '장기근속'을 하는지는 중요 지표다. 오래 다닐만하니까 다닐 테니. 일전 공공기관 갑질 사례집을 보다가, 알게 된 사실 하나. '직장 내 괴롭힘'은 소위 괜찮은 직장에서 많고, 공공기관이 가장 심각하단다. 왜냐고? 나도 안 그만두지만, 저 인간도 안 그만두기 때문이다. 진상도 장기근속한다.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이 든다면?

그렇다. 사주를 보러 가야 한다. 한 곳은 용하다고 추천을 받아서 직접 갔고 한 곳은 전화 상담을 했다. 둘 다 가지 말라고 했단다.


"거기 가면 미친*이 있어."

개싸움이 예상이 된다고. 언니는 그 사람이 누구일지가 짐작이 간다고 했다. 언니는 의협심이 강한 전사 타입이다. 그분이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길래 대 놓고, 문제제기를 했다고 한다. 그분에게 있어서 언니는 구세주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분이 살짝 독특했다는 점이다. 언니는 이 분을 요리조리 피해 다녔고, 좋은 기회가 생기자 이직을 했다. 회사를 그만두던 날, 그분은 언니를 따로 불러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

"내가 OO부장님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

언니는 무서웠다고.


"언니가 이전에 도와줬던 사람인데, 그 사람이 왜 걸려요?"

"일반적인 상상의 수준을 뛰어넘거든요."

살면서 많은 인간들을 겪어봤다고 생각했지만, 그분 이야기는 내 상상력을 뛰어넘었다. 승무원 교육생 시절에 들었던 자고 있는 후배 얼굴에 토마토 주스를 엎었다는 전설의 그녀? 수준이었다. 놀라워서 옮기진 않으련다. 이 분도 길이길이 남아 한 역사를 그으실 분이군.


점쟁이와 반대의 선택을 한 언니


"개싸움이 예상된다면서 왜 가려고요?"

"오래 일할 수 있잖아요. 게다가 거기는 일. 가정 양립이 가능할 것 같아서요."

그렇다. 언니는 내가 잠들랑 말랑한 시간에, 퇴근을 하는 사람이었다.


"마음고생하느니, 그냥 몸 고생하는 게 낫지 않아요?"

"개싸움, 이길 자신이 있거든요."


착하다는 말

언니는 인상이 만만치 않다. '한번 덤벼보시든가?'라고 말할 것 같은 이미지. '착하다=순하다'라고 생각한다면 착한 사람은 아니다. '착하다=정의롭다'라면, 언니는 착한 사람이다. 내가 생각하는 '착하다'의 정의도 후자다.


정의로운 사람이 그렇듯, 책임감도 남 다르다. 게다가 개싸움에 자신 있다니!!! 어쩜 이리 멋질까?


난 고상한 사람이 별로다. 진짜 고상하면 그냥 수준이 높은가 부다 하는데 고상한 척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겪어서 그런 것 같다.


"레오야, 나 너무 힘들어."

"무슨 일인데?"

"일하는 아주머니가 격일로 와."


이 말을 한 언니는 전업주부다. 전업주부라고 사람 쓰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자기 돈 자기가 쓰는데 뭘, 그걸 굳이 풀타임에 집안 일도 하는 사람에게 말하는 그 고상함? 이 당황스럽다.


vs


"난 개싸움 자신 있거든."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런 혈기왕성한 발언이라니!!!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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