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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정 Jun 30. 2022

지옥철에서 내렸다.

사람 사는 이야기

지옥철에 갇히다.

출근을 5시 반에서 6시 사이에 하니, 출시간 전장연 시위를 겪을 일이 없었다. 시위로 회사에 늦는다고 부서 단톡방에 톡이 떠도, '그런 일이 있었구나?' 정도로 각했다.

불편했겠네. vs 장애인 이동권은 보장해야지.  생각은 딱 그 정도에 멈춰 있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뉴스도 잘 안 본다. 남의 일에 관심이 별로 없다. 전장연 시위도 중요하고 관심을 가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직접 겪은 적이 없어 더 그랬 것 같다. 거 생각보다 힘들구먼.


6시 퇴근길, 4호선에서 승하차 시위가 시작됐다. 장마라 공기도 축축한데 빽빽하게 들어선 사람들 무리들이 내뿜는 짜즈응 아우라. 그 와중에 내 뒤에는 나랑 키가 비슷한 사람이 등을 돌리고 있었는지 궁둥이가 맞닿았다. 따뜻한데 불편했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궁둥이가 부딪힌다. 허.


충무로에서만 이럴 줄 알았지?

'난 혜화에서도 멈출 거야.' 약 올리듯 열차는 다시 멈췄다. 여기서 거의 10분을 넘게 기다렸다. 그 와중에 엄마는 계속 전화를 하신다. 엄마는 문자 확인을 못하신다. 문자로 이따가 연락하자고 보낼  수도 없는 데다 전화를 안 받으면 받을 때까지 전화를 하신다. - 째의 집요함은 아무래도 할머니를 닮은 것 같다. 안 되겠다 싶어 내려서 통화를 했다. 내린 김에 버스나 탈까 싶어 밖에 나갔더니, 지옥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 우산에 가려 몇 번 버스가 오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11분 뒤면 온다는 버스는 11분이 지나도 지체 표시.

20여분을 기다렸더니 이제는 곧 도착이라고 뜬다. 그래. 이걸 타야지.


집에서 오매불망? 게임을 하며 날 기다릴 둘째에게 전화를 했다.

"배고프지만 조금 참아? 엄마가 막국수 해줄게."

그제부터 막국수 타령이라 쿠*에서 평 좋은 걸로 로켓**쉬 배송을 시킨 터였다.

아이는 배가 고파서 라면 끓여먹었다고 한다.


곧 도착 이랬는데?


1**번 버스가 사라졌다. 난 버스를 보지도 못했는데? 다시 대기 18분다.

30분 넘게 기다렸다고! 시계는 저녁 7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시 둘째에게 전화를 했다. 

이 녀석 쿨하게 한 마디 한다.

"택시 불러줄 테니 비도 오는데 택시 타고 와."

아 진짜. 택시를 불러도 내가 부르지. 네가 부르냐. 이 초딩이 허세는.

- 래. 네 여친은 이쁠 것 같다. 이 놈 말로만 위하고 그러는 거 아니지?


에라 모르겠다. 밥이나 먹자.


마로니에 공원 뒤편으로 들어갔다. 요기가 바로 어릴 적 나와바리다. 는 종로 토박이다. 쌀국수를 시켜놓고 짬을 내서 어제 저장해둔 글을 이리저리 고쳐본다. 

'흠. 임팩트가 부족해. 살 좀 붙여서 다음에 써먹자.'

'쌀국수 다 먹고 커피는 어디서 마실까?'

지옥철을 핑계로 집에 갈 생각은 안 하고 딴짓할 생각이 한가득이다.


<글뤼가베뒤르>를 아시나요?


얼마 전 브런치 작가님 글에서 '글뤼가베뒤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https://brunch.co.kr/@uniquelife/10

'글뤼가베뒤르'는 비가 몰아치는 풍경을 창 밖으로 바라보는 것을 뜻하는 아이슬란드 단어라고 한다.


이런 멋쟁이들 같으니라고. 구구절절하게 묘사할 필요 없이 '나 오늘 글뤼가베뒤르 해.'라고 말하면 되는 거야? 나도 한번 글뤼가베뒤르 해봐야지. 

<출처 : Pixabay>


창 넓은 카페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는 거야. 커피 한 모금을 머금고,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는 거지. 센치해진다. 이 단어를 알게 되고 제대로 '글뤼가베뒤르' 하려는 데...,

남편이 승하차 시위 멈췄다고 톡을 보냈다. 얼른 오란다. 그래, 집에 가자. 내일도 출근해야지.


글을 쓰면 좋은 점


좋은 점 하나.

지옥철도 글 소재가 된다. 일상이 풍부해진다.

좋은 점 둘.

시간이 잘 간다. 지금 시각은 8:27 아직도 집에는 가지 못했지만 글 하나는 완성해간다.


그래. 지옥철도 보내기 나름이지.

내려서 밥도 먹고 쉬어도 좋고, 이렇게 두 손으로 핸드폰을 부여잡고 글을 써도 좋고.

'일체유심조'까지는 아니지만, 그 시간을 짜증 내면서 보낼지, 즐겁게까지는 아니어도 의미 있게 보낼지는 내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오늘 지하철 4호선으로 퇴근하신 분들, 꿀꿀한 기분은 시원한 비와 함께 가볍게 흘려보내시길 바랍니다.

https://youtu.be/Ico2EmLXjj4


한줄요약 : 일체유심조, 지옥철도 마음 먹기에 달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냥 한번 해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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