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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정 Aug 22. 2022

시계 맞춘다고 의자 위로 올라가는 적극성은 필요없지만,

회사란 말이지.

자칭 타칭 구글 최고령 임원인, 정김경숙 님 '계속 가봅시다. 남는 게 체력인데.'에 나오는 일화다.


머리사 메이어 기자간담회에 진행 중에 천장에 빗물이 샜다. 한 여직원이 티셔츠 차림으로 양동이를 들고 뛰어다니며 물을 받았다. '서구권에서도 저렇게 솔선수범하는 직원이 있구나!' 지은이는 감탄했다.

그다음 날이었다.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 커뮤니케이션 총괄 VP 오프닝 스피치가 있었다. 무대 단상에 오른 사람은, 바로 어제 그 여직원이었다. 레이첼 웻스톤 부사장이다.


직급이나 격식을 따질 필요 없이, 가장 빨리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일을 해결하면 된다는 리더상은 그날 이후 내 머릿속에 롤모델로 깊이 각인되었다.(본문 中)

의자 위로 올라가 시계 초침을 맞추는 여자


지금 회사로 이직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일이다. 이전 회사에서는 사실상 실무를 혼자 처리했었다. 300인 미만에 인사와 총무를 겸하는 부서였고, 과장 직급은 나 혼자였다. 알아서 하는 게 익숙했다. 8명이나 되는 인원들, 그것도 인사업무만 하는 부서로 이직을 하니, 업무 스타일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업무 각기 역할이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었고, 부서원들은 업무 내용을 공유하지 않았다. 자기 일만 알아서 하면 되는 분위기다. 처음에는 이게 신기하고 업무 공유가 안돼서 불편했는데, 나중에는 남의 일에 신경 쓰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모르면 책임을 안 져도 되니까.


초반 내 업무는 평가였다. 평가시스템을 ERP에 구축하는 일이다. 정식 보고서 버전 업만 거의 30번을 했나? 비공식 버전업은 50번 가까이한 것 같다. 프로그래머와 야근, 주말 근무를 불사르며, 드디어 대망의 직원 설명회 날이 왔다. 나는 PPT를 당연히 내가 하는 줄 알았다. 발표자는 부서장과 차장이었다. 전날 모의 연습을 하는데, 설명회를 하는 회의실 시계 초침이 안 맞았다.

(부장) "이거 시계가 시간이 조금 안 맞는 것 같은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벽에 의자를 기대 놓고 올라가 시계를 맞췄다.

놀란 차장은, "남자 직원들 많은데 왜 네가 올라가서 해?"라고 했다.


거기 왜 남자 직원이 나오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치마를 입고 있었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지나치게 적극적인 모습에, 같이 있었던 부서원들이 조금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 나 실수했구나!'

그날 이후 나는 이 회사에서는 가능하면 나를 드러내지 말아야겠구나 생각했다.


자판기 버튼을 누르고 컵 나오는 데 손을 대고 있는 사람


이 분 책을 읽다가 공감한 일화가 또 있다. 이분도 자판기 커피 선택 버튼을 누르고, 컵 나오는 데 손을 대고 있다고 한다. 바로 내 모습이다. 미리미리 하지 않으면 놓치는 일들이 많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다음 행동을 예견해 미리 일을 하고 있다. 데드라인이 있는 일이라면 진작에 다 해놓고 천천히 검토해본다. 그래야 마감에 급하지 않게 여유 있게 돌아볼 수 있고 실수가 적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놓치는 일도 많고, 자잘한 실수가 많은 편이다.


이런 성격이 잘 맞는 회사는 아마 스타트업이 아닐까 싶다. 규모는 적지만 의사소통 체계가 수평적인 구조를 가진 회사, 아니면 이런 모습을 좋게 봐주는 외국계 정도려나? 모든 일을 절차에 맞춰야 하고 조그마한 실수도 용납치 않는 회사, 실수를 하면 큰일이 나는 줄 알고, 새로운 도전은 하지 않고 하던 일을 그대로 하는 회사와 나는 잘 맞지 않는다. 영어 공부를 계속했던 이유도, 어쩌면 이런 면이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조직이 외국계라고 여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름답다 = 나답다


'아름답다, ', 아름은 '나'라는 의미다. 아름답다는 말은 결국 '나답다'는 뜻이다. 나 다운 삶은 어떻게 살 수 있는 것일까? 이걸 직장에서 실현할 수 있는 것인가?


이미 이 회사에 근무한 지 7년 차에 접어든다. 자기 업무만 알아서 하면 되는 환경이 편해졌다. 일. 가정 양립도 가능하다. 이 회사 덕분에, 아이들과 같이 하는 시간도 늘었다. 전에는 일하느라 보지 못했던 취미 활동들도 할 수 있었다. 글쓰기도 지난번 회사에서는 꿈도 못 꾸는 일이었을 것이다. 급여는 배가 됐지만 일은 줄어드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배부는 소리일 수도 있다.


일을 하면서 자아성취가 가능할까? 무엇을 시작해서 완성하기까지 스트레스와 마감에 대한 압박감을 잘 알기에, 지금은 이전처럼 일을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다. 지난번 인사모임에서 봤던 사람들은 대부분 몇 년 이내에 이직을 한 번씩 했었다. 점프업이 능력을 보여주는 시대다. "이직 생각 없으세요?"라는 질문에, "전 지금 다니는 회사 뼈를 묻으려고요."라고 대답했다.


회사가 좋냐고? 아니다. 다만 이 회사가 지금 내가 고를 수 있는 최선의 회사인 것 같다. 내 할 일만 하면 퇴근이 보장되는 회사. 이 이상을 바라는 것도 욕심이다. 이렇게 다짐은 하지만, 마음 한편이 헛헛하다. 주도적으로 내 일을 해서 그 결과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회사에서는 이런 성취 경험을 가지긴 글렀으니 취미 생활에 열정을 퍼부어야 하는 걸까? 나는 왜 육아에 올인하지 못할까? 아이들은 아이들, 나는 나라고 생각하는 걸까? 이런 생각들이 이기적인 건가 고민이 된다. 이런 모습도 내 모습이고 나 다운 생각이겠지.

<출처 : Pixabay>


한줄 요약 : 나 다움이 회사와 맞는 다면 최선의 선택이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욕심부리지 않는다. 내가 나일 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꾸준히 찾아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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