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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정 Nov 01. 2022

오랜만에 들려온 소식 - 부고

사람 사는 이야기

어제 하루 휴가를 냈다. 볼일을 마치고 장례식장을 향했다. 아침에 부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2년 만에 연락이 온 아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같이 노무사 시험을 준비하던 아이였다.


이전 회사에 다닐 때, 종로에 있는 학원에서 노무사 1차를 준비했다. 회사에서 가까워서 선택을 했는데, 전략적이지 못한 접근이었다. 노무사 준비를 하는 학생들 대다수는 고시촌에 있는 법학학원에서 준비를 하는데, 배우는 내용이 거기서 거기겠지. 회사 끝나고 가려면 가까운 데가 좋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곳은 공인중개사 학원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친하게 지냈던 여자아이가 학원 자습실에서 공부를 해서 찾아가 보면, 몇몇 아주머니들이 남들이 공부를 하건 말건 속닥거리기도 했다. 여자아이는 "덜 심심해서 좋아요."라고 특유의 긍정 마인드로 이야기를 했다.


1차 준비를 하면서 같이 수업을 듣던 대학교 4학년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내 나이 또래 직장인 남자분 이렇게 4명은 2차에 같이 학원을 옮겼고 그 김에 친해졌다. 주로 대학생들과 내가 같이 어울려 지냈고, 내 또래 남자분은 가끔 오가며 말을 하는 정도였다.


1차 시험 직전 무료 모의고사를 고시촌에 있는 모 학원에서 하길래, 여자아이와 같이 가서 테스트를 봤다. 학원 관계자가 어느 학원 출신인지?를 물어보길래 이야기를 했더니, 거기서 시험 준비를 하는 사람도 있나?라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 느낌이 왔다. 옮겨야 하는구나. 여자아이는 그 사이에 학원 직원들이랑 친해져서 그냥 거기서 공부를 하겠다고 하길래, 문제지 답안지가 여기는 모의고사도 시험과 동일한 걸 준다. 거기는 아니다. 옮기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남자아이한테도 옮겨야 한다고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고 말했다. 돌이켜보면 나 빼놓고 다 법 전공이었는데, 왜 그들이 고시촌을 안 갔는지도 의문이다.


이래저래 우리 4명은 고시촌에 합격률이 제일 높다는 학원으로 옮겼다. 내 또래 직장인과 남학생은 둘이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하고 답을 하는 방식으로 공부를 했고, 나와 여학생은 각각 알아서 공부를 했다. 내 또래 직장인은 상당히 실력이 뛰어났는데, 그때 합격하진 못하고 나와 여자아이만 합격을 했다. 이분은 그다음 해에 합격을 했다. 가끔 검색해보면 이분이 쓴 글이 나온다. 국내에서 가장 큰 노무법인에 들어가시더니 실력 발휘를 하고 계시는 것 같다. 다들 노무사 시험에 패스를 했는데, 남학생만 남았다. 매번 0.5점 이렇게 소수점 차이로 떨어지니 미련을 버리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 사이 아이는 신문기자가 되었다가, 학원일을 했었다.


우연히 안국동을 지나다가 내가 보였다고 한다. 저 헤어스타일은 누나밖에 없다고 용기 내서 연락을 했다고 한다. 지하철역을 가고 있는데, 카톡이 울렸다. "누나, 지금 건너편 한번 봐봐요." 아이는 건너편에서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커피숍에 들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미 일반 회사를 들어가기에는 나이가 많은데,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밥벌이는 하지만 계속할 수 있는 일인지 모르겠다. 미래에 대한 불안한 마음이 크다고 했다. 나도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잘 몰랐다. 같이 공부했던 형은 초라한 모습 보이기가 미안해서 연락을 못하고 있다고 하길래, 언제라도 꼭 다시 연락을 해보라고 이야기했다. 네가 성공해서 짜잔 하고 나타나면 기뻐하겠지만 그건 네가 만족하는 모습을 보았기에 기뻐하는 것이지. 네가 그 형을 다시 만나기 위해 꼭 성공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있는 그래도 널 좋아했을 사람 같다.


급작스러운 부고에 장례식을 갔는데, 그 형이 보낸 화환이 보였다. 아이는 그때 내가 한 말에 용기를 내서 연락을 했다고 한다. 그분도 연락을 하고 싶었지만, 그 아이가 어떤 마음으로 연락을 못하고 있을지 알 것 같아 연락을 못하고 있었다고. 그 사이에 남학생은 취업을 해서 잘 다니고 있었다. 그나마 어머니가 자기가 자리 잡은 모습을 보고 돌아가셔서 다행이라고 했다. 그리고 오래 아프시지 않아서 다행이라고도 했다. 같이 공부를 했던 두 학생 모두 아버지 없이 엄마가 혼자 아이들을 키웠다. 나 역시 마찬가지지만, 직장을 다니고 있었던 나와, 그들은 불안함의 정도가 달랐으리라. 막일을 하시는 어머니, 내가 이걸 합격을 해야 좀 더 편히 사실 수 있을 텐데, 마음의 부채까지 더해져 그 어린 나이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었다.


이제 좀 사실만 했는데,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식인가. 부모님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아직 젊으신 나이인데. 안타까웠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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